지난 주말,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손흥민 선수는 해트트릭으로 실력을 증명하며 세간의 부진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지난 시즌 득점왕이 선발 제외되는 굴욕까지 감내했다. 새벽 방송을 보며 골이 터질 때마다 환호성을 질렀는데, 경기 종료 후 흥분이 가시자 조금은 계면쩍었다. 그렇게나 배타적 민족주의와 맹목적 국가주의를 경계했어도 한국 선수의 위풍당당과 경기장 곳곳의 태극기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소설가 박완서의 말을 빌리자면, “아아, 나도 바로 토종이었다!”
애국심과 민족주의가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평생을 한국에서 살았으니 어쩔 수 없다. 마이클 빌리그는 독립이나 해방과 같은 뜨거운 민족주의와 일상의 민족주의(banal nationalism)를 구분한다(M. Billig 저, banal nationalism). 세계화 시대 민족주의는 사멸되기보다는 사소하고 진부한 수준에서 상징으로 떠다니고 다른 주의, 주장, 입장과 떨어지거나 붙기를 반복한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애국심과 민족주의가 정체성을 결정하는 본질적 실체로 여겨질 때다. 손흥민 선수와 나의 공통점은 단지 남성이고 우연히도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점뿐이다. 노력을 기울여 함께 쌓은 것은 전무하다. 그럴진대, 우연을 당연으로 여기며 매주 영국의 프로 스포츠 경기를 챙겨보는 스스로가 한심하다. 민족과 애국을 넘어 다른 종류의 정당화가 더해져야 한다.
스포츠팬이 된다는 것에 굳이 대의명분이 필요할까. 그저 스포츠가 좋아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체로 여러 구단과 팬은 왜 스스로가 최고 구단이자 열광적 팬인지를 스포츠 이외의 영역에서 증명했다. 기성용, 차두리 선수가 몸담아 익숙한 스코틀랜드의 셀틱 FC는 애초 19세기 아일랜드 대기근 속에서 빈민구제 목적으로 설립된 축구 구단이다. 이들의 박애주의와 인류애는 구단 정신으로 남아 팔레스타인 독립을 지지하고 현재 영국 여왕 서거 국면에서 영국 제국주의의 폐해를 환기시키며 군주제의 비민주성을 조롱 중이다. 영국의 명감독 켄 로치가 영화 ‘티켓’(2005)에서 알바니아 난민과 스코틀랜드 청년 비정규직 사이에서 빚어진 갈등을 괜히 셀틱 프라이드로 중재한 것이 아니다. 비록 막대한 프로 스포츠의 자본 공세 앞에서 셀틱 FC의 위상은 과거와 다르지만 그럼에도 이들 구단과 팬들의 자부심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이며 국제적이다.
지동원, 기성용 선수가 활약한 선덜랜드 AFC도 매력적이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죽어도 선덜랜드’(2018-2020)는 조선업과 광산업의 오랜 중심지였다가 영국 산업 재편으로 급격히 몰락한 선덜랜드에서 굳건히 지역민을 결집하고 단합하며 지역 공동체의 구심점으로 자리한 한 축구 클럽을 조명한다. 비록 하부리그로 강등되고 승운은 따르지 않지만 선덜랜드 AFC는 지역민의 유일한 희망이다. 스페인 왕정에 반대해 까딸루냐 지역의 분리 독립을 지지하는 FC 바르셀로나나 공업지역이 밀집한 북부에 비해 경제적으로 낙후된 남부 이탈리아의 대표 축구클럽 SSC 나폴리도 빠질 수 없다. 꼭 축구만 지역 밀착형이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의 프로 농구 리그 NBA의 유명 선수들은 비시즌이면 지역 커뮤니티에서 아마추어들과 함께 뛰며 흑인 공동체를 위한 자원봉사를 한다. 지난 시즌 우승팀의 주역이자 결승전 MVP였던 스테픈 커리는 최근 어린이를 위한 동화책을 출판해 흑인 아이들의 꿈과 열정을 응원했다.
우리의 스포츠에도 민족과 애국심을 넘는 지역, 계급, 인종, 인류애가 함께 할지는 의문이다. 애초 한국 프로 스포츠가 80년대 전두환 정권의 우민화 정책 속에서 급조되었으니 한계는 분명했다. 그러나 40년이 훌쩍 지난 오늘, 여전히 국가와 재벌이 스포츠의 중심에 자리한 것은 부끄럽다. 마침 이번 주는 국제축구협회의 국가대항경기 주간이다. 여전히 국가대표를 응원하겠지만 도대체 국민이라는 우연을 떼고 나면 과연 나와 이들 사이에 무엇이 남을지 의문은 계속 된다. 대한민국이라는 응원 구호는 생각보다 공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