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흥 대한체육회장
대한체육회의 위상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는 말이 관가에서 나온다. 최근 2027 충청권 하계세계대학경기대회 조직위원회 구성을 둘러싼 문화체육관광부와의 갈등에서 체육회가 판전승을 하면서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을 지난달 22일 직접 만난 데 이어 지난 4일 전화로 체육계 현안 등을 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충청도 사투리는 구수했지만 에너지가 느껴지는 목소리에 에두르지 않는 직설적인 화법에서 강한 자신감이 묻어 나왔다.
-2027 대회 조직위 구성을 놓고 중재에 나선 국무조정실이 체육회의 손을 들어 주면서 일단락됐지요.
“정부 부처가 관련 기관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는 풍토는 지양돼야지요. 관료는 국민의 머슴인데 자꾸 주인 노릇을 하려는 습성이 있어요. 이런 관료주의는 문체부뿐 아니라 모든 정부 부처가 비슷할 겁니다. 국가 예산 편성이나 목적 사업 등에서 벗어나면 안 되지만 너무 작은 부분까지 과도하게 개입하고 간섭하면 창의성이 발현될 수가 없죠.”
●부처 간섭 지양해 산하기관 자율 줘야
-문체부가 산하기관에 갑질을 하나요.
“갑질은 나쁜 의도를 갖고 괴롭히는 것인데, 그런 건 아니고. 관료 사회는 산하기관에 과하게 간섭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아요. 정부가 주도권을 가지고 가겠다는 의도는 이해할 수 있지요. 하지만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에는 (산하기관에) 권한을 줘야 해요.”
-문체부 입장에서 보면 체육회가 너무 나가는 것 아닐까요.
“어떤 사안이 있으면 상대 의견을 들어 조화롭게 타협해야죠. 일방적 지시가 아닌 상호 간에 존중과 협력이 필요해요. 예전부터 문체부에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어요.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지 대응을 하지 않으니 그냥 (바뀌지 않고) 갑니다. 문체부에선 내가 보기 싫을 수도…(웃음).”
-산하기관장은 보통 상급기관에 할 말을 못하던데요.
“내 성격이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수석 부회장 때 잘나가던 당시 김종 문체부 차관과 최순실 세력하고 붙었는데, 내가 아주 박살을 내버렸지(웃음). 나하고 싸운 사람들은 모두 징역 갔어요.”
-권력과 붙을 정도면 세네요.
“안 세요. 나 굉장히 험블한(겸손한) 사람이야. 체육회 머슴이에요(웃음).”
-그런 행보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신경 안 써요. 왜냐면 세상은 어차피 반반이니까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인데, 나는 내 삶에 충실할 뿐이에요. ”
●체육행정 일원화 스포츠정책위 곧 출범
-코로나 팩데믹이 끝나면서 국민들의 체육활동이 부쩍 늘었어요.
“누구나 차별 없이 스포츠에 참여하고 향유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인 ‘스포츠권’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 운동을 즐기는 인구가 많아지고 있지요. 이런 스포츠권을 보장하는 ‘스포츠기본법’도 시행됐고요. 제가 6년 동안 국민의 ‘스포츠권’을 제대로 실현하려면 문체부와 교육부 등 여러 부처에 분산된 스포츠 행정을 하나로 모아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곳을 만들어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는데, 이제 현실이 됐어요. 인선 작업이 마무리되면 국가스포츠정책위원회가 곧 출범할 거예요.”
-총리와 함께 이 위원회의 공동위원장을 맡나요.
“대한체육회장을 당연직 민간위원에 넣었더니 ‘자기가 위원장하려고 위원회를 만들었다’는 얘기가 들리기에 ‘안 한다’고 했어요. 스포츠 정책의 일원화를 꾀한 뒤 앞으로 금융위원회처럼 스포츠 정책만 담당하는 국가스포츠위원회를 만들어야죠. 스포츠가 일상화된 나라는 의료비가 적게 듭니다. 제 모토가 ‘스포츠를 통한 건강한 대한민국,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겁니다.”
●스포츠는 민주시민 소양 키우는 교육
-갈등이 많은 우리 사회에서 스포츠가 사회 통합 기능을 했으면 합니다.
“순간의 응집력과 강한 통합력을 발휘하는 것은 스포츠밖에 없어요. 어린 학생들에게 운동을 강조하는 이유도 그래서예요. 누구에게나 똑같은 규칙이 적용되고 실력으로 승부를 결정하는 스포츠는 윤석열 정부의 공정과 맞닿아 있지요. 승패를 떠나 시합을 통해 서로 협력하고 결과에 승복하는 과정을 통해 민주시민의 소양을 기르는 겁니다.”
-하지만 입시 위주 교육으로 스포츠가 외면받는 게 현실입니다.
“정부에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학생들의 운동입니다. 스포츠 클럽이든 정규 교육과정이든 꼭 필요합니다. 프랑스의 ‘가방 없는 날’처럼 학생들이 정기적으로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서야죠. 이번 정부에 기대를 걸고 있어요. 교육개혁안에 입시 말고 이런 내용도 들어가야 합니다.”
-오는 9월 항저우아시안게임 준비는 잘되고 있나요.
“코로나로 5년 만에 열리는데 직전 대회(39종목, 1044명)보다 더 큰 규모가 될 거예요. 그동안 대회에 목말랐던 선수들이 우수한 기량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내년 강원동계청소년올림픽에 지난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처럼 북한이 참가할까요.
“북한이 개성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한 이후 남북 간 스포츠 창구가 완전히 단절됐어요. 청소년올림픽을 통해 강원도가 동계스포츠의 메카가 되도록 지원할 겁니다.”
-저출산·고령화 시대에 엘리트체육은 어렵겠지요.
“선수로 뛰는 젊은층이 감소하고 있죠. 길은 학교체육에 있다고 생각해요. 모든 학생들이 운동에 참여하는 생활체육이 나중에 노인체육으로 이어지길 바라요. 생활체육에서 운동에 소질있는 학생들을 발견하면 이들을 엘리트체육으로 이끌면 돼요.”
●인물 의존 탈피한 스포츠 외교 해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느낀 점이 있다면요.
“IOC 위원으로 4년 활동하는 동안 국제스포츠 무대에서 소수 인물에 의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꼈어요. 올해 국제 스포츠기구들의 본부가 있는 스위스 로잔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할 겁니다. 스포츠 외교의 교두보로 삼아야죠.”
-보수, 진보 정권에서 두 번이나 회장이 됐는데 그 비결은 정치력인가요.
“정치력은 아니고, 위(권력)가 아닌 아래(체육인)를 보고 일했기 때문이죠. 저는 편을 가리지 않으니까 여야 관계없이 친하게 지냅니다. 제가 불교 신자잖아요. 불교의 핵심 사상이 중도잖아요. 양극단을 버리는 것이 아닌 양변을 포용하는 것이 진짜 중도다 이거예요. ”
-정치권에서 러브콜이 많았지요.
“예전에도 받았고 지금도 받죠. 비례대표·지역구, 진보·보수 진영 양쪽에서 출마 권유를 많이 받았지요. 하지만 정치를 하는 순간 당적이 다른 반쪽이 떨어져 나가죠. 왜 그런 일을 하겠어요. 난 진짜 안 해요.”
-정부에 하고 싶은 얘기는 없나요.
“가장 좋은 지도자는 머슴 같은 지도자라는 말이 있지 않나요. 용기를 북돋아 주고 기회를 균등하게 주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지도자죠. 역대 정부를 보면 현장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체육계를 망쳐 놨어요. 현장 전문가에게 맡겨 책임을 지도록 해야죠. 그렇지 않으면 우물 안 개구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기흥 회장은
충남 논산 출신으로 기업인으로는 이례적으로 23년간 체육계를 이끌고 있다. ‘스포츠 대통령’으로 불리는 체육회장을 연임할 정도로 체육계의 신뢰가 높다. 거침없는 성격으로 대정부·대국회 설득에 능해 그의 취임 후 체육회 예산이 1000억여원 늘었다. 근대5종연맹 부회장, 대한카누연맹회장, 대한수영연맹 회장, 광저우아시안게임과 런던올림픽 선수단장 등을 맡았다. IOC 위원이기도 하다. 조계종 중앙신도회장(10년)을 할 정도로 불심이 깊고 영향력도 크다. 불교리더스포럼 상임대표로도 활동 중이다.
최광숙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