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명. 2020년 매일 우리 곁을 떠난 자살 사망자 숫자다. 그해 10만명 중 25.7명이 극단적 선택으로 숨진 셈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10.9명)보다 2.3배 많다. 십수 년째 1위다. 과연 우리 사회는 자살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까. 사회적 안전망을 더 촘촘히 짜고 있을까. 쿠키뉴스가 살펴봤다.
더 많은 이들을 구하기 위해 다양한 제도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런데 시스템은 갖추는 것만큼이나 잘 작동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전문가들은 자살예방법의 실효성을 높여 안전망을 강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자살예방법 개정됐지만… 인력·예산 확보 ‘아직’
지난달 4일 시행된 자살예방법 개정안도 자살 고위험군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경찰·소방관이 자살시도자 등을 발견했을 때 본인 동의 없이도 이름, 생년월일, 주소, 연락처 등의 정보를 자살예방센터 등 기관에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전에는 자살을 시도해 응급실에 방문하더라도 당사자 동의가 없다면 사후관리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2020년 7월부터 2021년 2월까지 발견된 자살시도자 약 6만명 중 정보 제공에 동의해 자살예방센터 등으로 연계된 사람은 약 6%(3600명)에 불과했다.
자살예방법이 개정되면서 자살 고위험군에 선제적으로 개입해 예방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일선에 있는 경찰·소방관이 지체 없이 당사자의 기본 정보를 자살예방센터에 제공하고, 자살예방센터는 위기상담과 정신과 치료 연계 등 전문적인 사후관리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됐다.
다만 숙제는 남아있다. 이를 뒷받침할 예산과 인력이 아직까지 확보되지 않은 탓이다. 자살예방법 개정에 따라 제공해야 할 서비스는 늘었지만 추가 인력이 확충되지 않아 제대로 된 효과를 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관계자는 “현재 연구용역을 통해 필요한 예산과 인력을 추계하고 있는 단계”라며 “아직까진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아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뒷받침할 수 있는 예산과 인력이 마련돼야 법안 취지에 맞게 활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복지부 관계자도 “자살예방법이 개정되면서 자살예방센터에서 관리하는 자살 고위험군이 기존에 비해 2.5배 정도 증가해 5만명 정도를 관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현재 전국 자살예방센터 종사자가 467명 정도 되는데, 해당 법 시행으로 인한 업무 증가로 33명을 증원하는 안이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 포함됐다”며 “다만 재정당국에 요구했던 예산·인력은 더 많았는데 반영이 안 된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
“구조신호 기다리기보단 사각지대 발굴해 선제적 지원해야”
전문가들은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선 정부, 국회, 민간 등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충분한 예산 확보를 통해 법안의 실효성을 높이고, 자살이 사회적 문제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전 중앙자살예방센터장)는 “자살예방 예산이 전에 비해 많이 늘었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준의 예산이 편성되고 있진 않다”면서 “자살예방상담전화 등 안전망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사회적인 투자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자살예방법에 대해서도 “다양한 계획이 발표되고 있지만 인력과 예산이 뒷받침되지 않다 보니 아직까지 자살예방법 취지에 맞게 실행되고 있지 않는 것 같다”며 “특히 지난달부터 시행된 개정안은 자살 고위험군을 선제적으로 개입해 예방할 만큼의 인력이 충분히 마련되지 않아 제대로 효과를 내기 어려워 보인다”고 평가했다.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선 사회적인 투자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핀란드 사례가 대표적이다. 핀란드는 자살률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정부 차원의 대책을 세웠다. 심리부검 도입해 우울증 등 정신질환 조기 발견 및 치료, 정신건강 서비스 접근성 강화 등 자살예방 종합대책을 추진했다. 노력에 힘입어 1999년 30.2명에서 2017년 14.6명으로 자살률을 절반으로 줄였다.
일본도 매년 자살예방사업에 수천억원의 예산을 투입하는 등 대대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 그 결과 인구 10만명당 자살률은 2005년 22.1명에서 2017년 14.6명으로 감소했다.
백 교수는 “핀란드, 일본 등에서 범정부 차원의 대책을 수립한 뒤 자살률이 눈에 띄게 줄었다”며 “이제 우리도 자살 문제를 개인이 아닌 사회적 재난으로 바라보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사회안전망 내에서 복지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바꿔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살 고위험군의 구조신호를 마냥 기다리기보다 사각지대를 발굴하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국가가 취약계층에 선제적으로 개입하는 것도 자살률을 낮추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백 교수는 “수원 세모녀 사건 등에서도 볼 수 있듯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취약계층 발굴 등에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며 “고위험군이 자주 이용하는 곳을 찾아가서 지원 서비스를 알려주거나 재난문자처럼 고위험군에 이용할 수 있는 복지 서비스를 안내하는 문자를 보내는 것도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청소년의 자살 유발 정보 노출을 막고 내밀한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2020년부터 매년 자살예방 콘서트를 열고 있는 김애진 리얼코칭 대표는 “우울증을 앓는다고 하면 문제아라고 인식되는 사회적 편견 때문에 청소년들이 SNS 검색 등을 통해 음지에서 자살 관련 정보를 얻는다”며 “사회적 안전망 안에서 아이들이 고민을 털어놓고,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자살에 대한 인식 개선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황태연 한국생명존중재단 이사장은 “자살률은 그 나라의 소득 양극화, 노동시장의 불안정성, 성차별 등 사회의 민낯을 반영하는 수치”라면서 “그런데 우리 사회는 OECD 자살률 1위를 숫자로만 보고 있는 것 같다.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회도 자살예방법 취지에 맞게 제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자살예방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한 김상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회에서 입법을 했으면 제도를 잘 운영하는 건 정부의 책임”이라며 “필요한 인력을 확충할 수 있도록 국회 차원에서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자살예방을 위해선 사전적인 조치도 중요하다. 취약계층이 극단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처하지 않도록 복지제도를 촘촘하게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원이 민주당 의원은 “우리나라는 인구 10만명당 자살률은 25.4명, OECD 국가 중 1위라는 참담한 현실을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며 “자살예방을 위해선 상담 전문인력 확충과 자살시도자에 대한 선제적인 조치, 사후관리 등이 강화돼야 한다. 관련 예산확보와 인력 처우개선 등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복지부는 자살예방법이 실효성 있게 작동할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했다. 원소윤 복지부 자살예방정책과장은 “자살예방 정책에 편성된 예산이 부족하다는 것에 공감한다”면서 “2023년도 정부 예산안 중 자살예방정책 편성액을 늘리기 위해 재정당국에 추가적 예산을 요청하고 있다. 예산 확보 등 자살예방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고 했다.
자살예방법 제정 후 자살률 17.7% 감소
정부는 2011년 자살예방법을 제정해 자살이 개인만의 문제가 아닌 국가 책임임을 명기했다. 국무총리 산하 자살예방정책위원회를 신설하고 관련 정책을 설계하는 등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민간분야가 협력하며 다양한 자살예방 사업이 본격화됐다.
정부가 나서자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2010년 31.2명이었던 자살률이 2020년에는 25.7명으로 17.7% 떨어졌다. 5.5명을 더 구조한 것이다.
OECD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선, 국가의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더 많은 이들에게 손을 내밀기 위해 법안의 빈틈을 메워야 하는 이유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어플, 카카오톡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김은빈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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