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지킨 의료인들 인터뷰
정책 찬반 상관없이 진료 성명
전공의, 최소 32시간 연속 근무
“한두 달이 버틸 수 있는 최대치”
간호사, 의사 일 떠맡아 이중고
“전공의 복귀 후 벽 생길까 걱정”
증원만으로 지역의료 해결 안 돼
지역의사제·공공의대 등 시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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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은 환자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들입니다. 뇌혈관 환자가 발생했는데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어요.”
대한뇌혈관내치료의학회의 박석규 부회장(순천향대 서울병원 신경외과 교수)은 18일 서울신문 인터뷰에서 “(의대 증원 문제가) 해결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자리를 지키겠다”며 이렇게 말했다. 정부의 2000명 의대 증원 계획에 찬성해서가 아니다. 의정(醫政) 갈등에 하루하루 피 마르는 환자 곁을 떠날 수가 없어서다. 박 부회장은 “인력이 부족해 당장 급하지 않은 환자는 수술 자체가 어렵고, 응급 환자가 생기면 응급 환자부터 봐야 한다. 이러다 정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며 “답답한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정부 정책에 대한 찬반에 상관없이 환자 진료는 계속해야 한다”면서 “의료인의 숙명”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뜻을 모아 대한뇌혈관내치료의학회와 대한뇌혈관외과학회는 지난 15일 환자 곁을 지키겠다는 성명을 냈다.
한 달 전 전공의들이 떠난 데 이어 의대 교수들마저 오는 25일 사직서를 내기로 했지만 찰나의 순간 생사가 엇갈리는 의료 현장 최전선에 남은 의료인들은 오늘도 묵묵히 버텨 내고 있다. 비수도권의 한 수련병원에서 일하는 전공의 A씨도 그중 한 명이다. 그를 포함해 2~3명의 전공의가 병원에 남았다. 그는 “동료들에게 공감받지 못한다는 외로움, 두려움이 있지만 의사로서 해야 할 일을 할 뿐이고 환자 곁에 남는 게 도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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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는 “2020년 의료 파업 때는 집단 휴학에 동의하지 않는데도 휴학했다. 다른 목소리를 내면 따돌림당할 것이란 두려움이 컸다”며 “‘다름’을 용납하지 않는 의사 문화 때문에 다른 생각을 가지면 살아남기가 어려운 구조”라고 말했다. 특히 “전공의는 더 집단적이어서 동료들의 압력이 크다”며 “메디스태프(의사 커뮤니티)에 게시된 ‘집단 사직 불참 전공의 블랙리스트’를 보면서 공포를 느꼈다”고 털어놨다.
병원에 남은 현장 의료진은 이미 극심한 피로감에 시달리고 있다. 당직의가 부족하다 보니 한 사람이 사나흘 연속 당직을 설 때도 있다. 수도권의 공공병원에서 일하는 50대 신경과 전문의 B씨는 “앞으로 한두 달이 버틸 수 있는 최대치”라며 “공공의료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정신력으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B씨는 전공의 이탈이 본격화한 이후 비상 당직 근무를 서고 있다. 그는 “야간 당직 다음날에도 정상 근무를 하니 최소 32시간 연속 일하는 셈”이라며 “지난 주말엔 딱 30분 눈붙이고 환자를 보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 돌았다”고 말했다. 외래 진료 중에 응급 호출까지 대응하다 보면 병동에서 오는 전화를 놓칠까 봐 조마조마할 때가 잦다고 했다.
코로나19 방역의 최전선에서 맞섰던 간호사들은 의사 일까지 떠맡아 이중고를 겪고 있다. 서울 대형병원 중환자실에서 일하는 C간호사는 “정부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의사가 하던 일을 간호사가 대신하니 의료 대란이 끝난 뒤 혹시 소송을 당해 개인이 법적 책임을 져야 할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부서가 통폐합되면서 간호사들이 무급 휴직에 들어가거나 다른 부서에 배치돼 불안정한 상황에 놓였다”며 “이런 상황이 언제 끝날 것이란 기약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강대강 대치로만 가고 있으니 막막하다”고 호소했다.
그는 “멀리 지방에서 온 환자분이 진료받지 못하고 돌아설 때 가장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심혈관 중재술을 받으려고 기다리던 중 전공의 집단 행동으로 시술 날짜가 미뤄져 돌아갔던 환자가 결국 의식을 잃고 응급실로 실려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어지러워서 병원 일곱 군데에 전화하고, 겨우 여기로 왔어요.” “시술받게 돼 정말 다행이야. 이번 일이 잘 해결됐으면 좋겠어.” 환자들이 연신 ‘다행’이라며 고마워할 때 외려 마음이 아팠다고 C씨는 말했다. 그는 “업무에 과부하가 걸려 불안감도 크지만, ‘환자 고통을 덜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란 후배 간호사의 말을 듣고서 고맙고 또 미안했다”며 “전공의들이 돌아왔을 때 예전같이 지내지 못할까 봐 걱정된다. 의료 대란은 이미 현장에 큰 상처를 남겼다”고 씁쓸해했다.
서울신문이 만난 현장 의료인들은 “버티는 데도 곧 한계가 올 것”이라며 정부와 의료계 모두 한 발씩 물러나 대화를 시작할 것을 촉구했다. A씨는 “의사 집단은 내부 논리만 강해 ‘우리만 맞다’라고 생각하고, 정부는 의사를 ‘악마화’해 갈등만 커졌다”면서 “의사와 정부, 둘 다 져야 환자가 이길 수 있다. 서로 주고받는 게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증원만으로는 취약한 지역의료와 공공의료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필수 의료에 한해 지역의사제를 시행해 최소 10년간 지역에서 일하게 하고, 필수 의료를 위한 공공의대와 공공병원을 설립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는 “의사들의 특권(의식)을 깨는 정책도 나와야 한다”며 “(고교) 상위 20%도 국가고시를 통과하고 수련하면 충분히 괜찮은 의사가 될 수 있다. 여러 유형의 의사가 있어야 의사 집단이 권위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 부회장은 “이대로 대치만 하면 피해를 보는 이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의대생들은 유급할 거고 전공의들은 수련이 늦어지다 법적 피해를 볼 수도 있을 것”이라며 “2000년 의약분업 당시 줄였던 의대 정원만큼 늘리자는 목소리도 나오는 만큼 정부도 증원 규모를 2000명으로 고집할 게 아니라 단계적으로 논의하겠다는 방침을 세워야 논의의 진정성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단순히 의대생 2000명 늘어난다고 뇌혈관과 같은 필수 의료를 하려는 의사가 많아질 것이란 보장은 없다. 근본적인 대책부터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이현정·곽소영·서유미 기자
2024-03-19 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