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에서 40년을 살고 있다. 1919년 일본인을 위해 만든 삼판소학교가 전신인 삼광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삼판(三阪)은 일제 강점기 시절 후암동의 지명이다. 오사카(大阪)처럼 일본인은 이름에 동네의 외형을 넣길 좋아했다. 황석영의 소설 <강남몽>(2010)은 남산 아래 부자가 많았다고 했다. 일제 시기에는 용산역과 조선총독부 근처라서, 해방 후에는 미군기지에 인접해서 친일과 친미를 넘나든 이들이 용산에 부촌을 만들었다. 하지만 내 유년기에 부자 친구는 없다. 남산 줄기가 소멸해 평지와 만나던 삼광국민학교에는 동자동, 갈월동, 남영동, 청파동 아이들이 많았다. 동자동은 도동으로도 불렸다. 도둑이 많은 동네라 그렇다고 했다. 동자동에는 밤에 아이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서울역 앞 사창가와 겹쳤다. 친구 집에 놀러 가면 대개 부모는 부재했다. 나처럼, 그들 부모도 맞벌이였다.
2000년대 초반 아이러브스쿨 열풍 덕에 국민학교 친구들을 다시 만났다. 당시 모셨던 6학년 담임 선생님이 네가 대학에 갔을 줄은 몰랐다고 말하며 대견해 하였다. 어머니가 학교를 찾지 않던 후암동 아이들의 미래를 짐작했던 것 같다. 꾸미기에 관심 가던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종종 이태원으로 넘어갔다. 90년대 초반의 일이다. 유명 메이커 가품을 싸게 샀지만 대개는 으슥한 골목에서 상인에게 바가지를 썼다. 학교에서는 우범지대 이태원에 가지 말라고 했다. 주말 미군 외박에 맞추어 그곳은 불야성을 이루었다. 이들을 호객하는 유흥문화는 청소년에게 유해했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신촌이나 홍대에서 놀았는데, 어느 순간 이태원이 유행이었다. 다시 찾은 이태원은 상전벽해였다. 소방서 뒤쪽으로는 흑인문화권이 형성되어 이채로웠고 트랜스젠더바를 다니며 성소수자와도 어울렸다. 이슬람 사원은 색달랐다. 코란을 처음으로 보았고 이슬람 문화를 간접 체험했다. 해밀턴 호텔 뒤편은 핫 플레이스로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이 멋졌다. 가게를 몇 개나 운영하던 홍석천 씨도 자주 봤다. 브런치로 먹은 그리스, 태국, 미국 음식은 맛있었다. <이태원 프리덤>(2011)이란 노래가 나올 정도로 이태원은 자유와 관용의 상징이 되었다. 소비력만 있다면 말이다.
내가 살던 갈월동도 많이 변했다. 재개발 청사진과 함께 어릴 적 친구들은 하나 둘 사라졌다. 새로운 집주인들은 강남사람들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젊은이들은 떠나고 늙은이들은 세입자가 되었다. 늘 봤던 집들이 적산가옥으로 불리며 인터넷에서 관심을 끌었다. 이 무렵 용산참사(2009)가 일어났다. 용산역 앞 재개발 탓에 그곳에서 살며 일하던 이들을 추방하다가 참극이 빚어졌다. 참사 당일 걸어서 남일당 건물로 향했고 며칠 동안 경찰의 과잉진압을 규탄하며 서울역까지 시위대와 행진했다. 친구들은 떠났지만 정든 골목과 풍광을 지키고 싶었다. 박원순 시장 이후 재개발 광풍은 사그라졌다. 후암동과 갈월동은 어느 정도 옛 모습이 남았다. 개발이 제한되자 집들과 길바닥은 더 낡아졌다. 어떤 집은 아예 비어있다.
분가 후에도 여전히 용산에 산다. 지금 사는 곳은 삼각지다. 아모레퍼시픽 사옥 주변 ‘용리단’ 길이 뜨며 구옥이 헐리고 카페와 음식점이 들어선다. 골목은 늘 공사 중이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 뒤에는 주말마다 윤석열 대통령 옹호를 외치는 보수단체 집회로 종일 소란스럽다. 지난 주말 본가에 가면서 삼각지와 한강대로에 길게 줄 선 경찰버스와 경찰들을 스쳐지나갔다. 그날 밤, 이태원에서 150여명의 젊은이들이 유명을 달리했다. 초현실적이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이렇게 많은 안전 인력들을 보았는데. 비극이 벌어진 그 곳을 수없이 다녔고 한창 때는 나도 10월 마지막 날을 즐기던 곳이었는데. 십 수 년 간 사람 넘쳤던 그곳에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믿기지 않는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들의 지인과 가족을 위로한다. 비교할 수 없지만 40년 용산 주민으로서도 큰 충격이다. 용산참사가 있던 그 날만큼 황망하고 무력하다. 아픈 상처가 용산에 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