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실패 감추기 위해 ‘수치 왜곡’
그 피해는 결국 국민에게 돌아가
재발방지 위해 엄중 책임 물어야
“세상에는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 그럴듯한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다.” 19세기 말 영국의 보수당 정권에서 총리를 지낸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한 말로 알려졌다. 현실 진단을 위해 과학적 수치인 통계가 활용되지만, 쉽게 왜곡될 수 있다는 경고로 들린다. 영국은 한때 통계를 ‘정치 산수’로 불렀다. 어느 나라든 집권세력은 자신들이 중점 추진하는 정책 관련 국가 통계에 신경을 바짝 쓴다. 일종의 성적표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종종 통계 조작의 유혹에 빠진다. 그리스는 2000년 유로존 가입 기준을 맞추기 위해 연간 재정적자 규모를 국내총생산(GDP)의 6%로 확 낮춰 발표했다. 그러나 유럽연합(EU)이 실사하니 실제 재정적자 규모는 13%가 넘었다. 국가 신인도가 땅에 떨어져 그리스는 부도 위기에 내몰렸다. 아르헨티나는 돈을 마구 찍어내 펑펑 쓰다가 경제가 내려앉자 2006년부터 통계에 손을 댔다. 2013년에는 “아르헨티나는 빈곤에서 해방됐다”며 빈곤 관련 통계 집계를 중단시켰다. 그 결과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이었다.
소련의 붕괴 요인 중 하나도 통계 조작이었다. 소련 정부의 획일적 곡물 수확량 책정과 집단농장의 엉터리 보고로 매년 풍년을 기록했다. 하지만 빵 배급소의 줄은 갈수록 길어졌다. 공식 통계론 50여년간 연평균 9%라는 놀라운 성장률을 기록하던 나라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통계 조작이 어떤 대가를 낳는지 여실히 보여 준다. 어느 나라도 통계 조작으로 성공한 사례는 없다.
감사원이 문재인정부의 통계 왜곡 의혹에 대해 조사에 나서 파장이 크다. 소득 양극화 확대와 집값 상승, 비정규직 증가 등 정책 실패를 감추기 위해 청와대가 주요 통계 생산에 개입한 정황이 짙어서다. 문 정부 시절 소득·집값·고용 수치는 국민이 현실에서 체감하는 것과 동떨어진 경우가 많았다. 감사원은 황수경·강신욱 전 통계청장을 조사했고, 홍장표 전 청와대 경제수석과 장하성·김수현 전 정책실장 등 윗선으로 조사를 확대하고 있다.
가장 큰 의혹을 사는 건 소득 통계다. 문 정부는 2017년 출범 직후 ‘소득주도성장’을 내세워 최저임금을 크게 올렸다. 하지만 2018년 1분기 하위 20% 소득은 오히려 큰 폭으로 감소했다. 이런 내용의 가계동향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황수경 청장이 갑자기 경질됐다. 그는 “정부의 말을 잘 들었던 편은 아니다”, “통계가 정치적 도구가 돼선 안 된다”고 밝혀 논란을 불렀다. 후임 강신욱 청장은 “장관님들의 정책에 ‘좋은 통계’를 만들어 보답하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조사 방법이 바뀌면서 소득분배 지표가 개선됐다. 고약한 냄새가 물씬 난다.
집값 통계는 국민의 불신이 컸다. 2020년 김현미 당시 국토교통부 장관은 한국부동산원 통계를 근거로 “3년간 서울 집값이 11% 올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내놓은 서울 아파트값 상승률은 같은 기간 52%에 달했다. 숫자 논쟁으로 시끄러웠다. 국토부 산하기관인 한국부동산원이 고의로 집값을 왜곡했는지 감사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진보 성향인 경실련도 진상 규명과 처벌을 요구하지 않나.
고용 통계도 석연찮다. 통계청은 2019년 8월 기준 비정규직 근로자 수가 1년 전보다 87만명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문 정부가 강하게 밀어붙인 비정규직 제로 정책의 효과를 머쓱하게 만든 결과였다. 파문이 일자 강 청장은 “조사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에 과거와 비교하면 안 된다”고 진화에 나섰다. 통계가 정치에 오염되고 있다는 우려가 쏟아진 이유다.
국가 통계는 정부 정책 수립과 추진의 판단 근거와 기초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정확성과 신뢰성이 생명이다. 왜곡된 통계는 그릇된 정책을 낳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정권의 유불리에 따라 통계가 조작됐다면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의혹을 철저히 규명하고,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정권이 코드에 맞는 인사를 통계청장에 앉히는 건 위험하다. 정권의 ‘통계 마사지’ 유혹을 원천 봉쇄하는 제도적 장치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통계청장 임기제, 통계청 국회 소속 이관을 검토할 때다.
채희창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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