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는 정치가 스포츠와 전쟁의 중간 어디쯤에 있다고 말한다. 전쟁은 상대를 ‘죽일 적’으로 보고 스포츠는 ‘이길 경쟁자’로 보는데 우리 정치는 전쟁을 닮았다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오늘날 정치는 전쟁처럼 상대에게 퇴로를 열어주지 않고 몰살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9년 조국 사태로 빚은 광화문 집회와 서초동 집회의 대결은 더는 대화와 타협을 기대할 수 없는 한국 정치의 오늘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반복되는 전직 대통령들의 수난사도 우리 정치가 상대를 절멸할 대상으로 보는 전쟁에 다름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적폐 청산’으로 상징되는 문재인 대통령도 취임사에선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며 통합을 강조했지만, 약속은 공염불에 그쳤다.
지난 1일 출간한 책 ‘노무현 트라우마’는 스포츠에서 전쟁으로 공고화한 정치의 기원을 노무현 대통령 죽음에서 찾는다. 노무현의 죽음이 한 나라의 트라우마로 남아 여전히 현실 정치에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의미다. 저자인 손병관 오마이뉴스 기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지지자들의 죄책감이 우상에 대한 열광과 적폐에 대한 단죄로 반복적으로 발현되면서 정치가 선악이 맞서는 아레나로 전락한 게 아닐까”라고 반문한다.
저자는 2008년 말 박연차 리스트 수사를 둘러싼 검찰과 언론, 정치를 주목한다. 검찰은 새 정권 명을 받아 전직 대통령 일가를 거칠게 두들겼고, 언론은 수사 정보를 받아쓰며 검찰의 입에 이목을 모았다.
태광실업 회장 박연차에게 15억 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도 차용증을 내밀며 당당했던 노무현은 부인 권양숙이 대통령 임기 중 정상문 총무비서관을 통해 박연차에게 받은 100만 달러와 정상문이 챙긴 특수활동비 3억 원이 드러나자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돈이 그냥 빚 갚는 데 쓰인 게 아니고 아이들을 위해 미국에 집 사는 데 쓰인 것을 알고 충격이 굉장히 컸다.”(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 2009년 6월1일 한겨레 인터뷰) 당선인 시절 참모들에게 “이권에 개입했다가 발각되면 아무리 최측근이라도 패가망신을 각오하라”던 노무현의 발언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노무현에 대한 수사가 ‘말을 쏟아내는 시간’이었다면 노무현의 죽음은 ‘쏟아낸 말을 거둬들이는 시간’이었다. “노무현 당선은 재앙의 시작”이라거나 “사즉생 생즉사 자세가 필요하다”던 언론인들은 노무현 죽음 이후 “죽음으로써 500만 명의 노무현으로 부활했다” 또는 “그의 죽음은 척박한 토양에 ‘말과 희망’이라는 새로운 씨앗을 뿌렸다”라며 표변했다.
노무현 정부의 성찰을 촉구했던 민주당도 ‘노무현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의 줄임말)로 뭉치며 강경 노선을 걷게 된다. “상대방(한나라당)을 말살과 배제 대상으로 생각하는 심리적 태도를 지니고 있는 한 민주주의가 제대로 될 수 없다”고 말한 ‘노무현의 사람’ 유시민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을 반세기 동안 지배해왔던 보수정당과 조중동을 중심으로 한 지배 카르텔에 대항한 정치 지도자는 노무현 한 사람”이라며 보수정권의 정치 보복을 질타했다.
책 1부는 이처럼 ‘노무현 지못미’ 정서가 형성되는 과정과 이후 정치인으로 등판하게 된 문재인의 운명, 박근혜 정권에 저항한 검사 윤석열의 성장에 관한 서술로 2009년에서 2017년까지 시간 흐름에 따라 사건들을 정리했다. 2부는 문재인 정부에서 ‘개혁의 선봉장’으로 떠오른 윤석열과 정권의 갈등을 다룬다.
저자는 “문재인 정부 전반기 내내 윤석열은 ‘문 정부의 사람’이었다.(중략) 이 시기까지만 해도 윤석열은 ‘노무현 트라우마’의 완전한 치유와 청산을 위해 적폐 세력에게 사정없이 칼을 휘두르는 ‘개혁의 선봉장’”이라고 평하면서도 “그러나 칼은 맘대로 빼고 칼집에 넣을 수 있어도 사람은 그럴 수 없는 법”이라고 꼬집었다. 문 정부가 이명박·박근혜 정권 인사를 적폐로 규정해 청산 작업을 벌일 때 가장 활용했던 조직은 아이러니하게 노무현을 몰아세운 특수통 검사들이었으며, 그 수장은 윤석열이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정권 출범 당시 내 머릿속에는 적폐 수사가 조속히 마무리되면 검찰 개혁에 돌입한다는 로드맵이 있었다. 그런데 윤석열은 적폐 수사가 마무리될 즈음이면 특수 수사가 필요한 ‘거리’를 들고 오곤 했다. 검찰 수사권과 기소권 분리 논의를 하려고 하면 큰 사건 수사로 존재감을 과시해 검찰 개혁을 회피하는 게 기본 전략이었던 거다.”
박근혜·이명박 두 전직 대통령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검찰에 좋은 먹거리였다. 국민도 검찰의 적폐 수사에 큰 호응으로 답했다. 2019년 6월17일 청와대는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를 지명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윤 후보자는 검사로 재직하는 동안 부정부패를 척결해 왔고, 권력 외압에 흔들리지 않는 강직함을 보여줬다. 특히 서울지검장으로서 탁월한 지도력과 개혁 의지로 국정 농단과 적폐 청산 수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검찰 내부뿐 아니라 국민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아왔다.”
‘정치인 윤석열’의 길을 열어준 것은 보복의 정치를 끊어내지 못했던 민주당과 문 정부였다. 윤 총장은 자신의 측근 특수부 검사들에게 주요 보직을 몰아줬고, 그 힘을 바탕으로 조국을 포함해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해 기소했다. 실제 범죄 혐의가 유죄로 확인되는 등 수사 성과도 가져갔다. 당시 여권은 추미애 장관을 필두로 ‘윤석열 쫓아내기’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문 대통령이 임명한 검찰총장이라는 타이틀은 대통령 결단과 운신의 폭을 좁히는 자충수로 나타난다.
이 책의 장점은 선동하지 않는 데 있다. 노무현을 과도하게 띄우거나 윤석열을 절대악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언론 기사와 정치인 발언 등을 시간 흐름대로 배치하고, 자신이 취재한 인터뷰 및 해설로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1년 ‘문재인의 운명’을 쓸 때 노무현의 죽음에 관해 ‘권양숙 책임론’을 선명하게 기술했다가 일부 참모들 반발에 “이게 핵심인데 왜 빼느냐”고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는 사실도 새롭다. 우여곡절 끝에 최종본에서 ‘권양숙 책임론’이 삭제되면서 ‘검찰 책임론’이 강하게 부각됐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책 말미 “노무현의 죽음 이후 이어진 전직 대통령 수난사는 우리가 이 오래된 망령, 더 직접적으로는 ‘노무현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문재인의 시대는 이 과제를 푸는 데 실패했지만 문재인 이후의 현대사는 노무현의 비극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고 썼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 역시 “문재인에게 당한 만큼 되돌려 주겠다”는 심사를 버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노무현 트라우마’에 갇혀 있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보복을 넘어 공존의 정치를 바라는 저자의 기대에 윤 정부는 부응할까. “접시 위 광어를 겁내지 말라. 사정 기관 구성원들이 접시 위의 광어가 물까봐 걱정해서 주저하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윤 정부 감사원 사무총장은 전 정권 인사에 대한 감사를 횟감에 비유하며 부하들을 독려했다고 한다. 윤 정부에서도 보복과 피의 냄새는 가시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