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대 ‘붉은 땅벌’ 박순자씨 별세
선수 은퇴 후 매월 후원·봉사활동
지난달 갑자기 쓰러져 의식 불명
생전 장기 기증 뜻 밝혀 생명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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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올림픽’ 여자 하키 은메달리스트 박순자(58)씨가 장기 기증으로 4명을 살리고 세상을 떠났다. 동료들과 함께 올림픽 여자 하키 첫 은메달을 안긴 박씨는 떠나는 순간까지 ‘영웅’으로 남았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은 지난달 30일 경희대병원에서 뇌사 상태에 빠진 박씨가 4명에게 장기를 기증하고 숨을 거뒀다고 30일 밝혔다. 박씨는 중학생 시절 육상 선수로 활약하다 고등학생 때 여자 하키로 뒤늦게 전향해 1986년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1988년 서울올림픽에선 금보다 값진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서울올림픽 당시 여자 하키는 비인기 종목이었다. 관심을 끌지 못했던 여자 하키팀이 올림픽 출전 첫 무대에서 은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이루자 국민은 선수들을 ‘붉은 땅벌’이라고 불렀다. 붉은 유니폼을 입고 필드를 저돌적으로 누빈다고 하여 붙은 애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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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자(앞쪽)씨가 1988년 서울올림픽 여자 하키 결승전에서 호주 선수들과 맞서는 모습.
한국장기조직기증원 제공
박씨는 올림픽 이후에는 하키를 업으로 삼지는 못했다. 당시만 해도 비인기 종목 실업팀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고, 한국 하키는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이후 침체기를 겪었다. 박씨는 국가대표 은퇴 후 생활가전 유지보수 팀장으로 일했다. 매월 어려운 이웃을 후원했고 꾸준히 봉사활동을 했다. 올해 한강 철인 3종 경기에 나갈 정도로 건강해 은퇴 후 사회복지사와 요양보호사처럼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을 하며 인생 2막을 열고자 했다. 그러나 지난 9월 갑작스러운 두통이 찾아왔고, 지난달 21일 쓰러져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박씨는 장기 기증자가 적어 이식받지 못하고 숨지는 이들이 많다는 소식을 접하고 생전에 가족들에게 기증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들도 생명 나눔을 실천하고자 했던 박씨의 뜻을 지켜 주고자 기증에 동의했다.
아들 김태호씨는 “취업했다고 같이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좋은 시간 함께 보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너무 아쉽다. 엄마는 매일 사랑한다고 말해 줬는데 난 그러지 못했다. 엄마! 미안해. 많이 사랑해. 그리고 고마워”라고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세종 이현정 기자
2024-12-31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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