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명 목숨 앗아간 화성공장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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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합동 감식… 국과수 사망자 부검
경기 화성시 서신면 일차전지 제조업체인 아리셀 공장 화재 이튿날인 25일 오전 사고 현장에서 경찰과 소방,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 유관기관 관계자들이 합동 감식을 벌이고 있다. 이날 국과수는 지난 24일 발견한 사망자 22명의 사인 규명을 위한 부검을 진행했다.
도준석 전문기자
23명의 목숨을 앗아간 경기 화성시 서신면 리튬전지 공장 화재는 ‘배터리 보편화로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까다로운 화재’에 취약한 우리 사회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아리셀은 참사 발생 이틀 전 공장 내 리튬전지에 불이 났는데도 자체 진화했다는 이유로 신고조차 하지 않았다. 이 업체는 5년 전인 2019년 허용량의 23배에 달하는 리튬을 보관하다 처벌됐고 소방시설 오작동 ‘전력’까지 있었다. 하지만 폭발 위험성이 있는 군용 리튬전지를 생산하면서도 세심하게 관리하고 긴급사항을 바로 알려야 하는 안전 의식은 갖추지 못했다. 전기차 시대를 맞아 배터리 산업을 미래 먹거리로 선정해 기업과 지방자치단체가 경쟁적으로 투자 유치에 나서고 있는 만큼 제대로 된 안전 기준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리셀 관계자는 25일 오후 공장 앞에서 열린 브리핑에서 “토요일이었던 지난 22일 오후에도 2동 1층에서 화재가 한 차례 발생한 바 있다”고 밝혔다. 불은 작업자가 배터리에 전해액을 주입하는 공정 중에 발생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때 한 배터리의 온도가 급상승했고 과열로 불이 났다.
이후 불을 자체 진화한 아리셀은 화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소방당국에 신고 자체를 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리셀은 2019년 허용치보다 23배 많은 리튬을 보관하다 적발돼 벌금형을 받았고 2020년에도 소방시설 일부가 오작동해 적발된 것으로 확인됐다. 참사 당시 폐쇄회로(CC)TV 영상을 보면 불이 붙은 리튬전지는 31초 만에 폭발한다.
리튬전지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화재 사실을 쉬쉬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소방당국 관계자는 “해당 시설은 화재를 자체 진화했더라도 신고해야 하는 시설”이라면서 “두 달치 신고 내역을 모두 살펴봤으나 (아리셀의) 신고는 없었다”고 지적했다.
참사 당일 아리셀은 이틀 전 화재 때처럼 분말 소화기를 통해 불을 끄려고 했다가 끝내 불길을 잡지 못했다. CCTV 영상을 보면 오전 10시 30분쯤 쌓아 둔 리튬전지에서 1차 폭발이 일어나자 직원들이 서둘러 인근 발화물질을 치운다. 25초쯤 지난 뒤 2차·3차 폭발이 잇따라 발생해 불길과 연기가 급속도로 확산하자 작업자 1명이 분말 소화기로 진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리튬전지가 연속적으로 폭발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1차 폭발 이후 42초 만에 내부는 까만 연기로 가득 차 참사로 이어졌다.
경찰은 이날 박순관 아리셀 대표, 안전 분야 담당자 등 공장 관계자 5명을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 등으로 입건했다. 박 대표는 공장 건물 앞에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해 너무 안타까운 마음으로 유족에게 깊은 애도와 사죄 말씀을 드린다”고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지만, 수사 대상이 됐다. 지금까지 23명이 숨지고 8명(2명 중상, 6명 경상)이 부상했다. 중상자 중 1명은 위독한 상태다.
이 공장은 리튬전지에 난 불을 진화할 수 있는 금속 소화기, 모래, 팽창 질석 등 전문적 소화 장비도 갖추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공장 3동 2층에는 배터리 화재 초기 진압용인 ‘D형 금속 소화기’나 불을 끄는 데 쓸 수 있는 모래, 팽창 질석 등도 없었다. 리튬은 물과 직접 접촉하면 발열·화재·폭발 등을 일으키는 성질이 있어 마른 모래로 불을 덮거나 금속 화재를 진압할 수 있는 전용 소화기를 써야 한다.
일반 소화기, 옥내 소화전, 화재 초기 경보를 통해 초기대응을 가능하게 해 주는 자동화재탐지설비 등의 시설이 구축돼 있긴 했지만 참사 때는 별다른 기능을 하지 못했다. 아리셀 관계자는 “리튬전지의 위험성을 알기 때문에 최대한 근접한 위치에 리튬 진화에 적합한 분말용 소화기를 비치했다”면서도 “구체적인 소화기 종류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게다가 현행 소방장비나 규정은 리튬전지 등 빠르게 발전하는 산업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소방규정은 리튬전지 화재 시 일반 분말 소화기로 진화하도록 하고 있다”며 “하지만 해당 소화기로는 불을 끌 가능성이 극히 낮다. 규정에도 화재를 막을 방법이 없었던 셈”이라고 말했다. 박재성 숭실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현재는 폭발이 어느 정도 끝나는 시점에는 물을 이용한 진화가 최선”이라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신기술을 개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과거부터 화재 발생 시 피해를 키우는 것으로 지목됐던 ‘샌드위치 패널’도 화마를 키우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얇은 철판이나 판자 사이에 스티로폼 등 단열재를 넣은 건축 자재인 샌드위치 패널은 화재 시 유독가스가 급증하고 화재 확산 속도가 빠르다. 1999년 23명이 숨진 화성시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2008년 이천시 냉동창고 화재(40명 사망) 등 인명피해 규모가 컸던 화재에서는 샌드위치 패널이 피해를 키운 것으로 조사됐다.
정부는 사고 원인 규명과 함께 유사 사건 재발을 막기 위해 민간 전문가가 포함된 범정부 합동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근본적인 개선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이상민(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장) 행정안전부 장관은 “행안부는 재발방지 대책 수립을 총괄하고 고용노동부, 산업통상자원부, 환경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8개 부처 합동으로 유사시설에 대한 안전 점검과 외국인 화재안전교육 강화, 리튬전지와 같은 화학물질에 대한 소화약제를 새롭게 개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행안부는 화재 피해를 신속하게 수습할 수 있도록 화성시에 재난안전특별교부세 10억원을 긴급 지원하기로 했다. 소방청과 전국 지자체도 다음달 9일까지 2주간 전국 213개 시설을 대상으로 긴급 화재안전조사를 벌인다.
김중래·임태환·명종원·곽진웅·강주리 기자
2024-06-26 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