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로 된 성경은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없고, 가톨릭 사제가 아니면 성경을 소유할 수 없던 시절이다. 조명은 교회가 면죄부로 ‘구원’을 사고팔던 1517년 독일 바텐베르크의 마르틴 루터를 비춘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시작이 될 자신이 만든 95개조 반박문을 보며 두려움을 호소한다. 순간 무대 중앙에 벽처럼 서 있던 구조물이 회전하더니 시공간이 전환된다. 1세기 전인 1428년 영국의 시골 마을 로돈이다.
기독문화예술 전용 극장인 서울 강남구 광야아트센터가 올해 첫 번째 작품으로 무대에 올린 뮤지컬 ‘더북 : 성경이 된 사람들’ 공연 모습이다. 오는 6월 17일까지 공연한다.
이번 공연은 다양한 이유로 의미가 크다. 2013년 11월 1일 서울 충신감리교회에서 초연한 뒤 10년의 세월을 보낸 더북은 올해 파격을 시도했다.
대극장에나 어울릴 법한 회전무대를 216석 규모의 소극장에 접목했다. 그런데 과하거나 어색함은 없고 모든 사람이 성경을 볼 수 있는 시대를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10주년 무대를 위해 새로 합류한 박단추(52) 무대감독의 힘이다. 그는 뮤지컬 ‘아이언 마스크’‘메피스토’‘셜록홈스’‘여명의 눈동자’ 등의 무대를 디자인한 베테랑이다. 둥글 단(團), 추구할 추(追)자를 결합한 단추라는 이름은 박 감독의 활동명이다.
10년 전 더북의 시나리오를 썼고 지금은 연출을 맡은 용광민(35) 감독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최대치를 보여주자는 생각에서 박 감독을 영입했다”고 전했다.
두 감독에게 더북의 10년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최근 극장에서 만나 더북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이야기를 들었다.
시나리오를 쓴 용 감독이 더북의 시작을 이야기했다. 20대 초반부터 아트리에서 문화사역을 한 용 감독은 26살이던 2013년 아트리 대표인 김관영 목사로부터 시나리오를 직접 써 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아트리는 20대 청년들이 시나리오 작업부터 의상 소품 조명 음향까지 도맡아 하고 있었다.
용 감독은 “북한 이야기를 쓰려고 했는데 미국에 다녀온 김 목사가 롤라드(Lollard) 이야기를 해 줬다. 그 이야기가 운명처럼 다가왔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리고 ‘중얼거리는 자’‘독버섯’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롤라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에 나선 루터보다 100년 먼저 영국에선 모두가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용기 있는 움직임이 있었다. 극형의 두려움에도 물러서지 않고 성경 66권 중 자신이 맡은 부분을 외워 광장에서 외쳤다. 가톨릭교회는 영어로 된 성경을 퍼뜨리고 복음을 전한 사람들을 롤라드라 부르며 이단으로 간주했다. 더북은 이런 롤라드와 루터의 이야기를 교차하며 보여준다.
교회의 반응은 뜨거웠다. 2013년 초연 이후 인천 전주 하동 광주 대전 부산 등에서 공연했고 2017년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해 서울 대학로의 열린극장에서 장기 공연했다. 1년간 371회 공연해 5만3000여명이 찾아오면서 소극장 뮤지컬로는 유례없는 성과도 냈다.
이는 대학로에 기독문화예술 전용 극장인 ‘작은극장 광야’를 여는 의미 있는 결과로 이어졌다. 2019년 서울 압구정로데오로 이전해 ‘광야아트센터’로 개관할 때 개관작도 더북이었다.
용 감독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10년을 맞아 무대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박 감독을 찾았다.
그는 “무작정 찾아가 함께 하자고 부탁했는데 흔쾌히 수락했다”면서 “10주년 의미도 있지만, 박 감독이라는 전문가가 합류함으로써 무대는 물론 조명과 소품의 영역까지 전문성을 키우게 됐다”고 말했다.
이 지점에서 용 감독의 요청에 선뜻 나선 박 감독의 생각이 궁금했다.
박 감독은 “(나는)무대와 미술을 책임지는 게 무대 감독이다. 작품의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끄집어내 작품이 가진 주제의식을 구현하려고 한다”면서 “무엇보다 디자인할 때 첫 느낌이 중요한데 더북이 주는 인상은 강렬했고 명료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현재 출석교회를 정해 놓지 않은 노마드 신자다.
더북의 새로운 10년은 무엇일까. 용 감독은 ‘대극장’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기독교인들만 즐기는 뮤지컬이라는 한계를 넘어 보다 많은 사람이 봤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용 감독은 “소극장 공연도 매력 있지만 지금 시대에 뮤지컬은 대극장”이라며 “기독교 작품이 문화적으로 힘을 발휘하려면 결국 대극장이라는 환경 속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강조했다.
이어 “예수님 시대에도 믿지 않은 사람들은 분명 있었다. 세상 안에서 비기독인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할 계획”이라고도 했다.
더북에 처음 참여한 박 감독의 기대감도 남달랐다.
그는 “공연은 새로운 공간을 만날 때마다 새로운 숙제가 생긴다”며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면 더북이 명작으로 남을 수 있도록 모든 스태프들과 깊은 대화를 통해 무대의 방식을 찾아내려고 한다”고 했다.
서윤경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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