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플러스] 코로나19 등장과 함께 세계적인 비호감의 중국이다. 하지만 세계적인 대국으로 성장한 나라 또한 중국이다. 중국은 우리 역사, 문화와 불가분의 관계로 지금도 정치, 경제적으로 우리나라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국으로 발전해가는 중국과의 관계 속에서 대한민국도 세계적으로 우뚝 서길 바라는 마음에 중국 기행을 시작한다.
내가 살게 된 곳 다롄
이곳에서 남은 4개월 동안은 코로나 때문에 다른 장소 방문이 힘들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중국에 와서 살게 된 곳인 다롄이라는 장소는 소개하지 못했다.
다롄! 이곳은 어떤 곳일까? 여러 경로를 통해 알아본 다롄이라는 도시는 한 마디로 말하면 한국 람들이 살기에 좋은 곳이다. 과연 그럴까? 다행스럽게 다롄은 환경도시라는 이야기와 함께 번화한 도시이면서 살기에도 편하다는 인식들이다. 아는 교감 선생님으로부터 내가 살던 송도 신도시와 제법 비슷하다는 이야기도 들었더니 더욱 안심이 된다.
여행 책을 찾아보니 학업은 베이징에서 직장은 상하이에서 노후는 다롄에서 라는 말이 있었다. 중국의 근현대사를 보면 우리가 들어도 제법 알만한 마오쩌둥 다음 서열의 린뱌오 같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요양을 하거나 장기간 휴식을 취했으며 근래에는 유명한 중국의 연예인들이 다롄에 별장이나 집을 사놓는다고 하니 아마 추측해 보건데 살기에 좋다는 말일 것이다.
역사를 통해 본 다롄은?
다롄은 중국 랴오닝 성에 있는 도시이다. 행정구역상 랴오둥 반도 남쪽 절반을 이루는 5개의 현(縣)과 해군항인 뤼순(旅順)이 포함된다. 랴오닝 성에서는 성도인 선양 다음 대도시로, 20세기 초 러시아와 일본의 지배 아래 산업 중심지로 발전했다. 그래서 다롄 시내에는 러시아와 일본 거리가 형성되어 있다. 1950년대 이후 중공업과 경공업이 골고루 발전했으며 1990년대 개방 정책 이후 중국 동북 지방에서 가장 발전한 도시가 되었다.
19세기 말까지 다롄 일대는 작은 어촌마을이었다. 1898년 러시아는 중국 해군기지를 확장하여 태평양 함대를 위한 부동항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칭니와[靑泥圭]라는 작은 어촌을 선택하여 달니라는 이름의 주요 상업항으로 발전시켰고, 달니에서 하얼빈[哈爾濱:헤이룽장 성]까지 철도를 놓아 중국 동부철도와 연결시켰다. 그들은 널찍한 서구식 시가지를 설계했고 항구를 준설했으며, 부두와 선창 및 방파제를 건설했다.
1901년 남만주철도가 완공된 뒤 철도기지가 되었고, 남만주철도뿐 아니라 조선 및 중국 북부지방의 철도망에 기관차와 열차 및 철도장비를 공급하기 위해 거대한 공장이 건설되자 다롄의 기계조립 산업은 더욱 발달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건설계획의 첫 단계만 겨우 마무리되어 있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 맺어진 포츠머스 조약(1905)에 따라 랴오둥 반도의 지배권은 일본으로 넘어갔다. 일본인들은 항구의 이름을 달니에서 다롄으로 바꾸고 러시아인들의 건설계획을 마무리하여, 다롄을 아름다운 근대 도시와 유용한 근대 항구로 만들었다.
한국의 근대 시설뿐만 아니라 타이완의 총독부 등의 시설 등도 일본인들이 건설한 건물들이 많다. 생각보다 근대적 디자인이고 오랫동안 사용하기에 괜찮을 정도로 튼튼하게도 지어 놨다. 일본인들은 큰 배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항구를 준설했고, 새로운 방파제와 부두를 건설했다.
1931년에 이르자 다롄은 상하이 다음으로 교역량이 많은 중국의 주요관문이 되었다. 일본의 지배를 받는 동안 다롄은 주요한 산업중심지가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에 점령된 이 도시는 만주에 있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 피해가 적었고, 약탈도 그리 심하게 당하지 않았다.
그 후 다롄은 항구이자 산업중심지로서 활기차게 발전했다. 1951년 뤼순 시를 합병하고 ‘뤼다’라고 명칭을 변경했는데, ‘뤼다’라는 이름은 뤼순과 다롄을 합한 것이었다.
1981년 ‘다롄’이라는 이름으로 복귀했다. 1980년대 이후 다롄은 군용 함정을 개발하는 조선기지로도 발전했고, 2017년 4월에는 중국 자체 기술로 개발한 항공모함이 진수되기도 했다.
199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을 보이면서, 중국 전체 도시 가운데 10위권 안에 드는 경제력을 확보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전자산업과 IT산업의 중심지로 발전해왔다.
내가 살게 된 다롄은 중국의 동북 쪽에 있어 동북 3성이라 불리는 헤이룽장성(흑룡강성), 지린성(길림성), 랴오닝성(요동성) 중에 랴오닝성에 위치한 2선 도시이다.
중국은 도시를 크게 성급, 지급, 현급으로 나눈다. 땅이 워낙 크기에 34개의 성급 도시, 333개의 지급 도시, 2862개의 현급 도시가 존재한다.
행정구역 분류는 위와 같지만 각 도시가 가진 경제적 규모(GDP)나 도시 전체 규모(인구수), 정치적인 능력 또는 다른 지역에 미치는 영향력을 기준으로 각각 1,2,3,4,5선 도시 등으로 분류 하고 있다. 이 분류는 중국의 도시 종합 경쟁력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분류의 기준은 지역특성에 따라 시장수요, 소비성향, 문화, 시장성 등 많은 차이가 난다.
중국 개혁개방이 30년도 넘은 지금 성급 도시가 지급도시에 비해 반드시 시장성이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각 도시의 잠재된 시장성은 도시전체 규모와 인구는 물론 경제력, 문화, 주변도시와의 연계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대표적인 1선 도시로는 오래 전부터 중국의 정치와 경제를 대표하는 곳으로 베이징, 상하이, 선전, 광저우, 톈진 등을 꼽을 수 있다. 2선 도시는 항저우, 난징, 지난, 충칭, 샤먼 등이 있다.
중국의 과거 역사를 봤을 때 고대에는 시안이나 뤄양 등의 관중 지역 근대로 올수록 동북3성 지역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중국 천하를 재패한 주인공이 됐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중국의 근현대사를 보면 이곳을 차지했던 장쩌린 및 장쉐량, 공산당의 린뱌오 등은 동북의 중요성을 인지했고 그 지역 사람들에게 많은 추앙을 받던 사람들이다.
안중근 의사와 뤼순 감옥
다롄에서 우리나라 역사와 가장 관련 있는 유서 깊은 장소로는 뤼순감옥(旅顺监狱)이 있다. 랴오닝(요동)성 뤼순 시 뤼순 커우 구에 있었던 감옥으로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뤼순을 점령하면서 중국, 한국, 러시아인들을 수감했으며 더 많은 사람을 수감하기 위해 증축도 했다.
뤼순 감옥에는 1906~1936년 동안 11개국의 항일운동가 약 2만여 명이 수감되었다. 1941년부터는 한국인, 중국인 독립운동가 및 사상범을 수용하였고 1942~1945년에는 약 700명의 수감자가 처형을 당했다. 대표적으로 수감된 한국인으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 안중근, 신채호, 이회영, 박희광 등이다.
다시 1945년 8월까지 소련군이 주둔하였으며 1971년 7월 중국 정부에서는 ‘뤼순 일아(日俄)감옥 구지(舊地) 박물관’으로 하여 항일운동의 주요 국가 문화재로 지정해 관리해왔지만 군사기밀 보호 등을 이유로 외국인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2009년 8월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맞아 숨진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추모관과 전시관을 개관하면서 외국인에게 개방하기 시작하였다.
뤼순감옥을 정면에서 보면 판넬식의 조립식 일반 건물 같은 느낌이다. 서대문 형무소의 그 살벌함과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뤼순 감옥이라고 현판이 걸려 있는 벽 바로 뒤쪽에는 우리가 생각했던 빨간 벽돌 감옥 건물이 있었다. 매점도 있어 간식거리 및 기념품 등을 판매하기도 한다.
중국도 항일운동과 관련된 시설 및 박물관 등을 문화재급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선양의 9.18박물관이나 난징의 난징대학살 기념관이다.
한국 사람들이 제법 많이 오는 관계로 감옥의 곳곳에는 중국어 뿐 아니라 한글로 동시에 적혀 있어 많은 설명을 듣지 않아도 관람을 할만하다. 감옥에서의 열악한 생활과 고문방법 등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며 많은 수감자를 관리 감독하기 위한 감옥의 구조 또한 일본의 잔인함을 느낄 수 있었다. 서대문 형무소의 전시된 내용과 비슷한 부분들이 많다. 먼 이국까지 끌려와 고문을 당하거나 돌아가신 분들의 마음일 어땠을까.
감옥은 중심부에서 다른 곳이 한눈에 보이는 구조로 설계를 해서 간수가 수감자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감옥은 러시아가 다롄을 점령했을 때 만들었고 이후 일본이 점령해서 감옥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러시아식 건축양식이 보이는 듯하다. 감옥 옆으로 잔디와 나무들이 있긴 하지만 왠지 장소 탓인지 황량하기만 하다.
이곳의 관람 코스 마지막 즈음에는 사형장이 있는데 1934년 이 비밀사형장을 증설하였다고 한다. 사형장을 만든 후부터 해체될 때까지 많은 독립투사들이 이곳에서 사형을 당했는데 1945년 일본이 항복을 선포한 당시에는 더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
교수형을 행하고 목숨이 끊어지면 바로 떨어트려 나무통에 시신이 담기는 구조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묻히는 공간을 줄이기 위해 나무통에 시신을 넣고 수감자들을 시켜서 매장을 한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도 안중근 의사는 교과서에도 기술이 되어 있을 만큼 굉장히 유명하다. 안중근 의사를 비롯해 조선상고사를 쓰신 단재 신채호 선생 그리고 모든 재산을 처분해 독립자금으로 쓰신 우당 이회영 선생도 이곳 뤼순감옥에서 순국하셨다.
뤼순감옥의 건축물들은 2천여 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으며 수색실, 동쪽 감방, 암방, 3개의 교수형장, 고문실이 있으며, 담장 밖에는 노역을 할 수 있는 밭과 과수원, 벽돌공장 등 15개의 공장과 밭이 있었다.
2009년 중국 정부는 대한민국 정부와의 공조와 상호신뢰를 위해 전시실 우측에 600㎡ 규모의 ‘국제항일 열사전시관’이라는 별도의 전시관을 만들었다. 이곳에는 안중근 의사의 흉상을 세우고 그의 항일운동 사료와 기사들을 정리한 전시물들을 전시하여 사실상 우리 독립 운동가들의 전시관을 만들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과 우당 이회영 선생, 한인 애국단에서 활동했던 유상근, 최흥식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의 흉상과 사료들을 소개하는 총 4개의 소규모 전시실로 나뉘어 전시하고 있다.
한국에서 안중근 의사에 대한 교육을 할 때 함께 등장했던 하얼빈 역과 뤼순 감옥, 교과서로 접하고 말로만 들었던 이곳 뤼순 감옥, 중요한 역사적 현장을 방문 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다. 왠지 이곳의 역사적 의의와 함께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