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기준으로 사상 처음 6월에 열대야가 나타났다. 2주 전 밤에 몸이 더워 잠이 안 오길래 필자의 비만 때문에 잠을 설치나 자책했는데, 6월의 열대야였다.
지난 13일 한국은행은 기준금리 도입 이래 처음으로 빅스텝(금리 0.5% 인상)을 밟았다. 고물가·고금리가 지속하고 21세기 최대 경제위기가 닥쳐오고 있다. 우리는 이미 코로나19 재유행을 코앞에 두고 있는데, 기후위기에 경제위기까지 몰려오고 있다.
이처럼 내 집 안방까지 찾아온 위기 종합선물세트는 정치의 실패를 말해준다. 정치권에선 자기 들 책임이 아니라고 하지만, 정책 결정자가 책임자이고, 모든 정치인과 정당에 책임이 있다.
특히 한국사회의 정치는 기성정당과 엘리트 관료집단만이 그 권력을 독점하다가 위기에 봉착했다. 이는 1987년 민주화운동의 성과로 그해 탄생한 9차 개헌과, 9차 개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6공화국 제도정치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소수의 엘리트정치는 실패했고, 정부의 정책과 정당의 공약은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당명은 선거를 치르면 바뀌어 있고, 명분 없는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엘리트 집단은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 됐다.
권력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거대 양당은 물론이고, 대안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한 진보정당과, 정치적으로 관료화가 된 일부 시민사회운동 세력도 이와 같은 불신에 한 몫 기여했다.
정치에 대한 회의는 특정 정당에 대한 전통적지지 기반을 붕괴시켰고, 즉흥적인 정당 정책과 공약으로는 지지자를 모을 수 없는 현실이다. 현재 거대 양당의 이념과 정책이 뭔지 잘 모르겠고, 정치관련 뉴스는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만병의 근원 소릴 듣는다.
기존 정치에 희망이 없을 때 대중은 어디로 갔는가. 대중에겐 카리스마 있는 정치인이 필요했다. 매력적인 인물이 나타나면 그에게 열광하며, 정치 엘리트와 관료 집단을 처치해주길 기대했다. 그런데 정당도 엘리트도 못 믿겠다며, 카리스마 있는 ‘우리 ○○’ 만 믿을 수 있다는 풍토가 자리 잡았다. 이른바 ‘팬덤정치’가 등장했다.
‘팬덤(fandom)정치’는 팬의 대상인 ‘정치인 아이돌’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고 재가공하여 동일한 감정을 가진 이들과 함께 그 대상을 집단적으로 소비하고 지지하는 현상이다.
이러한 행태가 팬덤의 외부와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면, 대상의 이념과 정책을 민주적으로 전달하는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이 된다.
하지만 대안세력으로 성장하는 데 실패하고 집단적 폐쇄성에 빠지게 되면 대상을 공격하는 외부를 적으로 규정하고 테러를 가하기도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 연설을 계기로 ‘반지성주의’가 갑자기 회자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말하는 ‘지성’이 정확히 무엇인지 규정할 수는 없지만 ‘반지성주의를 말하다’의 일본인 저자 우치다 타츠루는 반지성주의가 단순한 무지 상태가 아닌 “외골수의 지적 열정”이라고 지적한다.
반지성주의자는 바보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지성에 대한 확신 때문에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라는 것이다. 폐쇄적 팬덤이 반지성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린 일부 폐쇄적인 극렬 팬덤과 반지성주의자를 염려하고 비난한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보자. 현대는 개인이 인터넷과 유튜브 등을 활용해 스스로 사회화하고 정치화하는 세상이다. 대중의 정치 참여 양식은 과거와 완전히 다르다. 심지어 대중과 엘리트의 이분법은 근대 초기 유럽 남성 엘리트가 만든 개념이라, 더 이상 대중이 ‘우중’도 아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김대중 전 대통령도, 요즘 스타 못지않은 정계 아이돌이었다. 스타 정치인은 항상 있었다. 반지성주의라 지적하고 비난하기는 쉽지만, 우리 집에 말 안 통하는 사람 한 명씩은 다 있고, 나조차도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일부 극렬 팬덤과 반지성주의자의 헛발질을 지적하기 전에, 대중의 후진성을 논하기 전에, 누군가 팬덤정치와 반지성주의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지는 않는지, 갈라치기로 이익을 보려고 하는 자가 누구인지 살피자.
도대체 누가 우리를 꼭두각시 취급하고 있는 것인지, 민주주의자인 우리가 이를 감시하고 바로잡아야 한다. 정치의 실패에 대해 우리는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고 하지만, 정치의 실패는 우리 공동체의 실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