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 아파트 9곳 가보니
충전시설 모두 지하주차장에 설치
질식소화덮개·이동식수조 등 없어
전기차 화재, 분말소화기 무용지물
“충전 구역 지상 설정 등 기준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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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주차된 전기차에서 불이 나 주민들이 불안을 호소하는 가운데 5일 서울 시내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별도의 전용 소화장비 없이 전기차 충전기가 설치돼 있다.
송현주 기자
“불나면 끄기도 어렵다는데 충전시설 근처에는 소화기 하나 달랑 있던데요.”
5일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 지하주차장의 전기차 충전시설 앞에서 만난 김모(40)씨는 “비가 오면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까 봐 충전하지 않는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날 서울신문이 서울 시내 아파트 단지 9곳을 둘러본 결과 전기차 충전시설 주변에 배치된 소방장비는 분말소화기가 대부분이었다. 단 1곳의 아파트 단지에만 전기화재 겸용 소화기가 구비돼 있었다. 전기차 충전시설에 대한 별도 안전기준이나 소방장비 구비 규정이 없어서다. 소방당국이 전기차 화재 시 사용하는 질식소화덮개나 이동식수조, 방사장치 등을 갖추고 있는 곳은 없었다. 한 아파트 관계자는 “임시방편으로 전기화재 겸용 소화기를 구매해 뒀지만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고 전했다.
현행법은 100가구 이상 신축 공동주택은 주차 대수의 5% 이상, 2022년 1월 28일 이전 건축허가를 받은 아파트는 2% 이상 범위로 전기차를 포함한 친환경 자동차 전용 주차구역을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전기차 화재에 대비해 전용 소화기를 설치해야 한다거나 전기차 주차시설에 화재나 안전 관련 장비를 구비해야 한다는 기준은 없다. 전기차와 같은 새로운 산업의 발전 속도를 안전 규정 등이 쫓아가지 못하면서 대형 재난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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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인천에서 불이 난 차량이 현장감식을 마친 뒤 옮겨지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행정안전부는 경기 화성 아리셀 화재 참사로 리튬배터리 등 전기차에 대한 안전성 논란이 제기되자 환경부, 국토교통부, 산업통상자원부 등 9개 관계기관과 태스크포스(TF)팀을 만들고 대책 마련에 나섰다. 하지만 아직 가시적인 결과는 나오지 않은 상태다. 환경부 관계자는 “전기차 화재의 위험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만큼 조속한 시일 내에 관련법이나 지침 개정 등을 통해 대책을 내놓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환경부와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KAMA)에 따르면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2017년 집계를 시작한 후 매년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2017년 2만 5108대였던 전기차 등록 대수는 올해 상반기 기준 60만 6610대로 집계됐다. 전국의 전기차 충전기 대수도 올해 36만대를 돌파했다. 관련 화재도 덩달아 증가하고 있다. 소방청에 따르면 2020년 11건이었던 전기차 화재는 2021년 24건, 2022년 44건, 2023년 72건으로 증가했다. 올해의 경우 5월까지만 해도 27건의 화재가 발생했다.
국립소방연구원의 ‘전기자동차 화재 대응 가이드’를 보면 전기차 리튬이온배터리는 한 개의 배터리에서 열폭주가 시작되면 다른 배터리 모두로 전이되는 특성을 지닌다. 일반적인 분말소화기로는 보이는 불만 일시적으로 꺼질 뿐 배터리 내부 온도가 떨어지지 않으면 다시 발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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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전기차 화재의 특성을 감안할 때 지하주차장에서 불이 나면 화재 진압이 어려워 피해가 더 커진다. 지난 1일 인천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발생한 전기차 화재도 8시간 20분간 불길을 잡지 못했다. 결국 주변 차량 140여대를 태운 후에야 꺼졌다.
서울신문이 이날 둘러본 아파트 단지 9곳 중 전기차 충전시설이 지상에 배치된 아파트는 단 한 곳도 없었다. 9곳 중 2곳은 지상에도 주차장이 있었지만, 충전시설은 모두 지하주차장에 있었다. 충전시설은 지상이나 지하 등 위치 제한을 두지 않아 아파트에 따라 설치된 곳이 제각각이다. 최근 신축 아파트는 주차장을 전면 지하화하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의 전기차 주차구역과 충전시설은 지하에 있다. 아파트 입주민 이모(47)씨는 “우리 아파트도 불이 난 인천 아파트처럼 전기차 충전시설이 지하 2층에 있는데 폭발하면 똑같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채진 목원대 소방안전학과 교수는 “지하에서 전기차 화재가 발생할 경우 대형 참사로 번질 우려가 있다”며 “전기차 충전구역 설정을 통해 우선 지하의 시설을 지상으로 올리고 주변의 가연물을 없애고 전용 소화기를 비치하는 등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김중래·송현주·김희리 기자
2024-08-06 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