갚아야 할 원금보다 이자가 더 커지면서 국가가 ‘빚 고문’을 하고 있다는 외부 지적이 나오자 정부가 원금만 받기로 했습니다.
법무부는 오늘(20일) 한동훈 장관 지시로 ‘초과 지급 국가배상금 환수 관련 관계기관 회의’를 열고 인혁당 피해자 이창복(84) 씨가 국가에 갚아야 하는 과다 배상금의 지연 이자 납부를 면제키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씨가 국가에 반환해야 할 원금 5억 원을 분할 납부하면, 그동안 발생한 지연손해금(부당이득반환 청구 소송 확정시까지 연 5%, 그 이후 연 20%) 약 9억6천만 원은 면제하기로 했습니다.
이 사건은 재심에서 누명을 벗고 국가배상금 가지급금을 받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들에게 국가정보원이 배상금 일부를 돌려달라고 요구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유신정권의 대표적 조작사건인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 피해자 76명은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의 1·2심 판결에 따라 2009년 배상금을 가지급 받았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2011년 배상금의 지연손해금(이자)이 과다 책정됐다며 이를 정부에 돌려줘야 한다고 판례를 변경했습니다.
배상금을 가지급받은 피해자들은 초과분을 반환해야 했는데, 이 중 28명은 생활고 등으로 돈을 토해낼 수 없었습니다.
국가는 이 가운데 피해자 이 씨를 상대로 2013년 초과 배상금 5억 원을 반환하라며 소송을 내 이겼고, 2017년엔 이 씨 자택에 강제집행 신청을 했습니다.
이를 두고 시민사회 일각에서 국가의 ‘빚 고문’이라는 비판이 나왔고, 국가인권위원회는 2019년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국가가 적극적으로 구제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 씨는 같은 해 강제집행을 불허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고, 재판부는 지난달 4일 이자를 면제하라는 화해 권고를 했습니다.
정부는 이날 법무부(승인청)·서울고검(지휘청)·국정원(소송수행청)이 참여한 회의 끝에 화해 권고를 최종 수용키로 했습니다.
법무부는 ▲ 예측할 수 없었던 대법원 판례 변경으로 다액의 지연이자까지 반환토록 한 점이 가혹할 수 있는 점 ▲ 국가채권관리법상 채무자의 고의 또는 중과실 없이 원금 상당액을 변제하면 지연손해금을 면제하는 것이 가능한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씨의 문제는 문재인 정부 때부터 법무부와 국정원 등이 해결책을 찾으려 논의했으나 매듭을 짓지 못했습니다.
배상금 이자 환수 포기를 권고한 재판부 조정 결정을 수용하면 국정원장이 국가에 금전적인 해를 끼치는 셈이 돼 배임죄로 기소될 수 있다는 우려가 국정원 실무진 사이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한 장관도 이 같은 우려가 내부 논의과정에서 제기되자 “그게 배임이면 제가 처벌받겠다”며 관계 기관들을 설득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다만 이 씨 말고도 원금과 이자를 갚지 못해 고통을 호소하는 피해자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개별 추가 소송이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한동훈 장관은 이날 오후 과천 법무부 청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국민의 상식적인 눈높이에서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책임 있는 당국자가 책임 있는 판단을 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다”며 “오로지 개별 국민의 억울함만을 생각했고, 진영논리나 정치 논리는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또 다른 피해자 구제에 대해서는 “말씀을 미리 일률적으로 드리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국민의 억울함, 법적 안정성 등을 고려해서 판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국정원은 “인권침해 등 잘못된 과거사를 진심으로 반성하고 피해자를 위로한다는 측면에서 선제적으로 대안과 해결 방법을 찾았다”며 “과거 정부가 해결하지 못한 이번 사안을 전향적으로 검토해 화해 권고안 수용 입장을 적극 개진했다”고 밝혔습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