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헌 80조’ 개정 두고 ‘이재명 방탄용’ ‘정치보복 차단’ 갑론을박
문자폭탄 대안으로 만든 당 청원 시스템, 계파 갈등 새 뇌관으로
“우리는 집토끼가 아니라 호랑이다.” 3월9일 대선이 끝나고 단 열흘 동안 더불어민주당 권리당원으로 새로 입당한 사람은 13만 명, 그중 약 3분의 1이 2030세대 여성이었다. 패배한 정당에서 볼 수 없던 입당 러시에 민주당은 반색했다. 이들은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존재감을 과시했고 대선 후 당내 한 토론회에 참석해 민주당을 주도하는 호랑이가 되겠다고 밝혔다. 당의 주권자가 되겠다는 분명한 선언이었다.
그러나 이후 이들의 주권은 이재명 의원을 지키는 데 집중적으로 발휘됐다. 스스로를 ‘개혁의 딸(개딸)’로 칭하며 ‘아빠’ 이재명을 향한 무한 지지를 약속했다. 지지의 반작용으로 이 의원과 다른 의견에 대해선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점차 개딸의 이름 뒤엔 ‘강성’ ‘팬덤’ ‘문자폭탄’ 등 억센 꼬리표가 붙었다. 당 지도부도 눈치를 살폈다. 어느새 이 의원을 지지하는 2030 여성들만이 아닌 4050세대와 일부 남성까지 포괄하는 표현이 된 ‘개딸’은 그렇게 민주당을 움직이는 가장 크고 강력한 ‘보이는 손’이 됐다.
“우리는 집토끼가 아니라 호랑이다”
8·28 전당대회 국면인 지금, 개딸들의 가장 주요한 임무는 윤석열 정부 검찰과 경찰의 수사로부터 ‘이재명 지키기’다. 이들은 당헌 80조 개정부터 꺼내들었다. 부정부패 관련 혐의로 기소될 경우 동시에 직무도 정지된다는 조항을 고치라는 요구다. 개딸들은 이 의원이 당 대표가 되더라도 이 조항이 그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검경이 이 의원의 여러 의혹에 대해 전방위 수사를 벌이고 있고, 기소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헌 개정을 관철시키기 위해 이들이 택한 창구는 ‘민주당 당원청원시스템’이다. 민주당은 강성 당원들의 문자폭탄을 방지하기 위해 8월1일 새로운 소통 창구로 청원 시스템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시스템이 열리자마자 이곳은 개딸들의 요구들로 도배됐다. ‘대선 이후 입당한 당원들에게도 전당대회 투표권을 달라’고 하는가 하면, 개딸들이 이른바 ‘수박’(겉은 민주당, 속은 국민의힘)으로 멸칭했던 이들을 겨냥한 ‘대선해당행위자처벌’ 청원도 제기했다.
그중에서도 당헌 80조 개정 청원은 닷새 만에 7만 명 이상의 압도적 동의를 얻어 최다 청원글로 등극했다. 청원자는 “검찰공화국을 넘어 검찰독재가 되어가고 있는 지금, 야당인 민주당 의원들에 대한 무차별한 기소가 진행될 것임은 충분히 알 수 있다”며 “민주당 의원 모두와 당원 동지들을 위해 해당 당헌은 변경 또는 삭제되어야 한다”고 했다. 민주당 전체를 위한 청원임을 강조했지만 시기상 이 의원을 보호하기 위한 ‘맞춤형 청원’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개딸 서브, 친명계 토스, 이재명 스파이크
개딸들의 청원은 곧장 계파 간 첨예한 갈등으로 번졌고 전당대회 최대 화두로 떠올랐다. 비(非)이재명계에선 명백한 ‘이재명 방탄용’ 개정이라고 규정했다. 당권 경쟁자 박용진 의원은 “이것이 사당화 논란으로 더 번지지 않게 하려면 이 의원이 직접 지지자들에게 자제를 당부해야 한다”고 했다. 비명계이자 친(親)문재인계인 전해철 의원은 당헌 80조가 문재인 당 대표 시절 혁신위에서 만들어진 점을 내세우며 “(당헌 개정은) 당의 혁신 노력을 후퇴시키는 일”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이에 친명계 의원들은 검찰의 보복수사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최소한의 보완 장치를 마련해 두어야 한다고 맞섰다. 논쟁의 당사자인 이 의원도 “무죄 추정의 원칙에 반하고 검찰의 야당 탄압 통로가 될 수 있어 개정을 고려해야 한다”며 개딸들의 요구에 힘을 실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의혹들이 부정부패 사안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저 때문에 개정하려는 것이 아니다”고 못 박았다.
5만 명 이상 동의를 얻은 청원에 대해선 당 지도부가 직접 답변한다는 규정에 따라 당헌 80조 개정 여부는 이미 정식 논의에 들어갔다. 현재로선 기소된 직후가 아닌 1심 판결에서 금고 이상의 형을 받으면 당직을 정지하는 쪽으로 바뀔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개딸들의 서브와 친명계의 토스, 이 의원의 스파이크까지 차례로 이어져 당헌 개정 가능성을 높인 것이다. 팬덤을 등에 업은 ‘이재명의 민주당’이 본격화되었다는 관측도 자연히 커지고 있다. 이번 당헌 80조 갈등은 앞으로 있을 개딸 현상의 단면이자 시작일 뿐이라는 분석이다.
‘직접 소통’ 중시 李, 개딸 자제시킬 유인 없어
물론 친명계에서도 폭력적인 행위를 하는 일부 개딸에 대해선 제재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면서도 이들의 메시지 자체를 배제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최고위원에 출마한 친명계 후보들은 개딸들의 의견을 공개 토론의 장으로 끌어와야 한다며 일제히 당내 소통 창구를 넓히는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서영교 의원의 ‘정치카페’와 장경태 의원의 ‘메타버스 민주월드’ 등이 대표적이다. 장 의원은 “정식 소통 구조를 넓히면 훨씬 더 다양한 당원의 목소리들이 쏟아져 섞일 것이고, 그 과정에서 논의들이 정화될 것”이라고 했다.
반대 측에선 이들이 근본 문제를 외면한 채 잘못된 진단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강성 팬덤을 활용하려는 당사자가 있는 한 공론의 장이 바뀌거나 늘어나도 지금의 ‘개딸 현상’은 계속될 거란 얘기다. 이상민 민주당 의원은 “강성 지지자들이 민의를 왜곡하지 않도록 자제시키거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않고, 되레 팬덤에 편승하고 이들의 권리를 더욱 키워주려는 정치인들이 먼저 반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정치 지도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강성 팬덤이 독버섯처럼 번지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당사자인 이 의원이 지금의 개딸 논란에 대한 직접적인 시정에 나설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팬덤 논란에 대해 그가 우려를 표한 건 지난 6월 지방선거 이후 지지자들과의 만남에서 “쓸데없이 과도한 표현을 하게 되면 오히려 상대의 반발심만 높이고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 조금 더 포지티브(긍정적)하게 표현해 달라”고 말한 것이 거의 유일하다. 오히려 안팎의 공세가 지금처럼 거셀수록 이 의원은 개딸들과의 거리를 더욱 좁히고 이들의 활동반경을 넓혀줄 거란 관측도 나온다. 이 의원으로선 대선 패배 이후 자신의 빠른 재기를 돕고 ‘어대명’(어차피 당 대표는 이재명) 분위기까지 만들어준 개딸들을 자제시켜야 할 유인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이 의원이 개딸 현상이 있기 훨씬 전부터 ‘직접 소통’을 중시해 왔다는 사실도 주요한 지점이다. 그는 2018년 경기지사 출마 당시에도 지금의 민주당 청원 시스템과 유사한 ‘도민청원제’와 도민을 입법 과정에 직접 참여시키는 ‘도민발안제’를 약속하며 ‘직접민주주의’를 강조했다. 이번 당 대표 출마선언문에서도 그는 “전자민주주의로 직접민주주의를 확대하고, 당과 당원 간 온·오프라인 소통 시스템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당원투표 상설화나 온라인 당원청원제 등이 그에 따른 구체적 공약이다.
이를 두고 비주류가 익숙한 이 의원이 자신의 정치적 자산은 당 바깥에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자신을 향한 견제와 공격을 막아낼 힘은 당원, 특히 자신을 향해 무한한 지지를 보내는 팬덤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의원의 이런 구상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 당 대표 시절 도입한 ‘온라인 당원 프로젝트’와 닮아있다. 당시 민주당에 가입한 10만 온라인 당원들은 문 전 대통령의 든든한 호위무사가 돼주었다. 하지만 반대로 당을 더욱 ‘친문당’으로 만들고 상대를 향한 강한 배타성을 드러냈다는 부작용도 낳았다. 이 때문에 이 의원의 직접 소통 의지와, 친문 당원보다 더 강성으로 평가받는 개딸 현상이 맞물려 나타날 결과에 적잖은 우려가 나오고 있다.
“민심을 외면하고 강성 지지층이 원하는 정치 쟁점에 당력을 집중했다” “강성 지지자들의 득세로 대화와 토론, 타협의 정치가 실종됐고 건강한 다수가 민주당을 멀리하는 주요 요인이 됐다”. 지난 7월 민주당 싱크탱크 민주연구원이 발표한 ‘6·1 지방선거 평가’ 보고서에 적힌 선거 패인이다. 연패를 끊기 위해선 강경한 당심에 매몰돼 놓쳤던 확장의 정치, 민심의 정치를 회복해야 한다고도 지적한다. 승리의 역사는 주체적인 호랑이를 자처했지만 결국 맹목적인 집토끼가 돼버린 이들의 지지만으로 결코 쓰일 수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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