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표적 공습에 나스랄라 사망
하마스 1인자 암살 두 달 만에 ‘제거’
이란 하메네이 “헤즈볼라 전폭 지원”
네타냐후 “때리면 우리도 친다”경고
이미지 확대
이스라엘군이 레바논 베이루트 남부 다히예를 공습해 친이란 무장정파 헤즈볼라 수장 하산 나스랄라가 사망한 다음날인 28일(현지시간) 레바논 남부 항구도시 시돈에서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그의 초상화를 들고 구호를 외치며 이스라엘을 규탄하고 있다. 30년 넘게 헤즈볼라를 이끌던 나스랄라의 사망을 계기로 이란과 미국이 가자전쟁에 참전해 중동전으로 확산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시돈 AP 연합뉴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최고 정치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야를 제거한 지 두 달 만에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 수장 하산 나스랄라까지 암살하면서 중동지역 전운이 최고조로 치달았다.
이란의 군사정치동맹 ‘저항의 축’ 가운데 최고 전력으로 평가받는 헤즈볼라가 무너지자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가 직접 나서 “모든 무슬림은 헤즈볼라를 지원하라”고 선언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도 “우리는 누구든 때릴 수 있다”며 이란과의 결전을 각오하고 있다고 응수했다. 이제 중동의 운명은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타냐후 총리는 2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 총회 일정을 마치고 귀국 직후 영상 연설을 통해 “나스랄라는 이란 ‘악의 축’의 중심이자 핵심 엔진이었다”면서 “우리 적들은 이스라엘이 파멸의 길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우린 지금 역사적인 전환점에 이르렀다”고 발표했다. 이어 텔아비브 이스라엘군(IDF) 본부를 찾아 하메네이를 겨냥해 “중동에서 이스라엘의 무기가 닿지 않는 곳은 없다”고 경고했다. 지난해 10월 시작한 가자전쟁이 이란과 미국의 참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열어 둔 것이다.
전날 IDF는 F15 전투기 편대를 띄워 헤즈볼라 지휘부 비밀회의가 열리던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남부 다히예에 초대형 폭탄 100여개를 퍼부었다. 이 공격으로 나스랄라가 사망했다. 그가 ‘무선호출기(삐삐) 폭발 테러’ 직후인 지난 19일 이스라엘을 향해 “레바논 남부로 들어오라”고 선전포고한 지 8일 만이다.
이미지 확대
27일(현지시간) 레바논 베이루트 교외 하레트흐레이크 지역이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불길이 치솟고 있다.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의 본부가 있는 이곳에서 지난 7월 30일 헤즈볼라의 사령관인 푸아드 슈크르가 암살됐다.
하레트흐레이크 AFP 연합뉴스
IDF는 나스랄라를 제거한 뒤인 27~28일에도 레바논 남부 로켓 제조 시설과 시리아 국경 지대에도 140여 차례 공습을 가하면서 압박 수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 공습으로 23~27일에만 레바논에서 11만명 넘는 피란민이 새로 생겨났다고 유엔이 전했다.
헤즈볼라는 “적과의 성전을 이어 가겠다”며 수도 텔아비브와 요르단강 서안을 향해 미사일 90발을 발사했다. 예멘의 친이란 후티 반군도 이스라엘 중부로 탄도미사일을 날렸다. 이들의 반격은 역부족으로 보인다. 일간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은 “미사일 대부분이 격추됐고 일부 잔해가 예루살렘 인근에 떨어졌다”고 했다.
최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군 최고사령관 푸아드 슈크르, 특수부대 라드완 사령관 이브라힘 아킬 등 핵심 지휘부 8명 가운데 7명을 잃은 헤즈볼라는 ‘1인자’ 나스랄라까지 폭사해 당분간 전열 정비가 불가능해졌다. 나스랄라의 사촌인 하셈 사피에딘이 빈자리를 채울 가능성이 크지만, 그가 수장이 되는 즉시 이스라엘은 암살을 시도할 것으로 점쳐진다.
올해 7월 말 하니야가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폭사하자 하마스 새 지도자로 뽑힌 야히야 신와르는 나스랄라 피살 이후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고 아랍권 매체 알아라비아가 전했다.
이미지 확대
이날 하메네이는 성명에서 “역내 모든 저항군은 헤즈볼라를 지원하라”고 선언한 뒤 안전한 장소로 피신했다고 로이터통신이 전했다. ‘저항의 축’ 양 날개인 하마스와 헤즈볼라 수장이 모두 살해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것으로 풀이된다.
그간 이란은 헤즈볼라를 ‘왕관의 보석’으로 부르며 애지중지해왔다. 전 세계 무장세력 가운데 가장 잘 훈련된 조직으로 평가받으며 이스라엘과의 교전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뒀기 때문이다. 1992년 창설 이후 헤즈볼라가 이란을 위해 수행한 역할을 고려하면 테헤란이 현 상황을 보고만 있기는 어렵다는 것이 대부분 전문가의 분석이다.
올해 7월 말 취임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은 중동전쟁 확대를 바라는 네타냐후 총리의 ‘미끼’를 물지 않으려고 신중을 기해 왔다. 어떻게든 미국 등 서구 세계의 제재를 풀어 이란을 ‘보통국가’로 탈바꿈시키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나스랄라 제거가 이란을 벼랑 끝으로 내몰아 ‘원치 않는 참전’에 나설 수 있다는 국제사회 우려가 커지고 있다. 온건파인 페제시키안 대통령이 군부 등 극단주의 세력을 얼마나 설득할지에 따라 향후 판세가 결정될 전망이다.
27일 금요일 예배 뒤 수도 테헤란 도심에서 시위대가 나스랄라의 초상화와 헤즈볼라 깃발을 들고 행진하며 ‘이스라엘 응징’, ‘미국에 죽음을’ 등 구호를 외쳤다고 AFP통신이 전했다. 후티 반군이 장악한 예멘 수도 사나에서는 수만 명이 모여 ‘이스라엘 응징’을 외쳤다. 이라크에서도 바그다드의 주이라크 미국대사관 인근 등 곳곳에서 나스랄라 사망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렸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이날 “이스라엘이 그를 죽인 것은 수천 명의 미국인, 이스라엘인, 레바논 시민을 포함한 수많은 희생자들에 대한 정의의 조치”라면서 “미국은 헤즈볼라·하마스·후티에 맞서는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완전히 지지한다”고 밝혔다. 미국과 함께 이스라엘·헤즈볼라 ‘3주 휴전’ 중재에 나선 프랑스는 “추가적 불안정과 지역 충돌로 이어질 수 있는 행동을 자제하라”고 강조했다.
류지영 기자
2024-09-30 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