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소년단을 필두로 케이팝의 위상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팝 음악’으로써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다 다양한 장르로 케이팝의 확장이 필요하다. 정책브리핑은 케이팝의 발전과 음악감상의 이해를 돕기 위해 대중음악의 다채로운 장르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1973년 8월 11일, 뉴욕의 브롱크스에 거주하는 자메이카계 미국인 DJ 쿨 허크는 개학을 맞이한 여동생에게 옷을 사주고 싶어한다. 옷을 살 돈을 벌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아파트에서 파티를 여는 것이었다.
‘백 투 스쿨 잼’이라는 이름을 내건 파티에서 DJ 쿨 허크는 두 대의 턴테이블과 하나의 믹서를 가지고 제임스 브라운의 곡 드럼 솔로를 연이어 믹스하면서 브레익 비트를 ‘창조’해냈다.
이 혁신적인 행위는 역사에 남겨졌고 사람들은 8월 11일을 힙합, 그리고 ‘턴테이블리즘(Turntablism)’의 탄생일로 기념하고 있다.
턴테이블리즘은 일반적으로 두 대 이상의 턴테이블과 크로스페이더가 장착된 DJ 믹서를 이용해 음악을 믹스하고 사운드를 조작해 창의적인 효과와 비트를 만드는 기술을 뜻한다.
두 대의 턴테이블에서 나오는 두 곡을 마치 하나의 흐름대로 이어 나가는 DJ 쿨 허크의 혁신적인 기술은 턴테이블리즘의 핵심이 되었고 이는 이후 보다 복잡한 형식으로 진화해갔다.
디제이들은 일반적인 벨트 구동식 드라이브의 턴테이블이 아닌 모터로 돌아가는 다이렉트 드라이브 턴테이블을 사용했다.
이 다이렉트 드라이브 턴테이블은 플래터(레코드가 올라가는 부분)를 임의로 앞뒤로 움직여도 턴테이블이 손상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레코드를 잡았다가 놓을 때 곧바로 스타트되어 소리의 왜곡없이 샘플을 플레이할 수 있었다.
초기 디제이들이 여러 턴테이블들을 오가며 실험했고 결국 테크닉스의 SL-1200 시리즈가 가장 안정적으로 재생됐기 때문에 디제이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졌다.
이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십년 동안 DJ 문화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턴테이블로 남아있다.
턴테이블 플래터를 손을 이용해 앞 뒤로 움직이면서 레코드를 컨트롤하고 그것을 리듬에 맞춰 크로스페이더로 끊어주는 행위를 두고 ‘스크래치’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처음 스크래치는 음악 감상 도중 실수로 발생하는 노이즈로 인식됐지만 그랜드마스터 플래쉬의 견습생 그랜드 위자드 테오도르가 그것을 하나의 퍼커션처럼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느 날 그는 어머니가 자신을 부를 때 턴테이블의 음악을 멈추기 위해 레코드에 손을 대고 있다 손을 움직이면서 우연히 스크래치 소리를 듣게 된다. 이후 이 방식이 널리 상용화되면서 스크래치는 라이브 쇼와 레코딩을 통해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그랜드 믹서 DST(혹은 DXT)는 레코드를 리드미컬하게 긁는 연습을 중점적으로 시작한다. 이후 그는 허비 행콕의 히트곡 ‘Rockit’에 참여하게 됐고 1983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허비 행콕과 공연하면서 스크래치가 전세계에 방송되기에 이른다.
‘턴테이블리스트’라는 단어는 DJ 디스크를 통해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다. 턴테이블리스트와 기존의 DJ와의 차이점이라 하면 디제이들처럼 음악을 재생하는 것이 중심이 아닌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고 조작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는 것에 있었다.
슈어라는 음향회사에서 나온 M-447 카트리지 겉포장에는 아예 ‘턴테이블리스트’라고 큼지막하게 박혀 있기도 했는데, 실제로 스크래치를 하는 디제이나 힙합 디제이들은 이 바늘을 주로 사용했다. 참고로 현재는 단종됐다.
턴테이블리스트들은 마치 턴테이블이 새로운 악기인 것처럼 행동했고 실제로 이후 턴테이블은 하나의 악기로서 거듭났다.
누가 더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가에 몰두할 무렵 DMC에서는 턴테이블리스트들을 위한 대회 DMC 월드 DJ 챔피언쉽을 개최했고 배틀에 최적화된 배틀 DJ들 또한 탄생한다.
DMC 챔피언쉽의 우승자는 금장으로 이루어진 테크닉스 SL-1200 턴테이블을 마치 우승 트로피처럼 받았다.
MC가 랩을 할때 뒤에서 비트를 재생하고 스크래치를 하는 디제이 포지션은 하나의 공식이 됐고 런 DMC의 잼 마스터 제이를 통해 디제이의 이미지가 확고 해졌다.
이후 에릭 B와 라킴, 갱스타 등이 한 명의 MC와 한명의 디제이로 구성되어 있는 포맷으로 활동했는데, 90년대 이후부터 인비저블 스크래치 피클즈, 비트 정키스, 얼라이스, 엑스큐셔너스 등의 턴테이블리스트 크루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가르치거나 함께 연습하면서 기술을 연마해갔다. 거의 묘기에 가까운 기술들을 완수해낸 이 크루들은 현란한 퍼포먼스를 펼쳤다.
뿐만 아니라 디제이들이 사용하기 편리하게 샘플과 비트를 모아 놓은 배틀 브레익 레코드들을 직접 만들어 판매하면서 턴테이블리즘 문화가 퍼져 나가는 것에 일조했다.
그리고 더욱 정교한 스크래치 방법들이 개발되어 갔고 복잡한 요소들과 리드미컬한 패턴으로 인해 씬의 저변이 커져간다.
이후 힙합은 물론 대중음악, 록 앨범들에서도 스크래치 사운드를 확인할 수 있게 됐다. 큐버트와 DJ 바부의 경우 각각 다른 시기의 서태지의 앨범에 참여해 스크래치를 녹음했다.
대체로 턴테이블리스트들의 진가는 라이브 퍼포먼스를 통해 면밀히 드러나곤 하지만 몇몇 앨범들을 통해서도 확인 가능하다.
엑스큐셔너, 그리고 키드 코알라 같은 이들은 턴테이블리즘에 입각한 꽤나 재치 있고 완성도 높은 앨범들을 내놓기도 했다.
90년대 말 발매됐던 <Return of the DJ> 시리즈들 또한 이 분야에 관심이 있다면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는 모음집이라 하겠다.
그간 힙합 문화를 다룬 영화들이 여럿 있어 왔지만 덕 프레이의 2001년 작 <스크래치>의 경우 턴테이블리즘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기 때문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볼만한 다큐멘터리일 것이다.
주로 뭔가 새로운 기계가 출시되었을 때 해외 턴테이블리스트들이 내한해 공연했던 기억이 난다. 턴테이블과 믹서가 합쳐진 형태의 QFO가 발매됐을 당시에는 이를 고안한 큐버트가 직접 기계 시연 및 공연을 하기도 했다.
레인에서 새로운 프로그램이 나왔을 때에는 재지 제이가 마찬가지로 시연 및 공연 형태로 내한했다. 바로 눈 앞에서 이들의 마법 같은 스크래치 스킬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은 단연 흥미로운 일이었다.
힙합과 관련이 없는 턴테이블리즘도 있다. 턴테이블을 악기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 1930년대, 1940년대, 그리고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구체음악(musique concrete) 작곡가들에 의한 오디오 장비 실험에서 부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존 케이지, 이후 크리스찬 마클레이와 오토모 요시히데 등의 실험적인 아티스트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대물림된다.
국내의 경우 노이즈 아티스트 홍철기가 자신의 입 안에 턴테이블 바늘을 집어넣는 등의 극단적인 퍼포먼스를 펼쳐 보이기도 했다.
턴테이블리즘은 출연 당시 혹은 2000년대 초만 해도 미래의 음악이라 불렸다. 하지만 음악 시장의 흐름이 바뀌고, 무엇보다 턴테이블을 충분히 대체할 만한 CDJ와 세라토 같은 디지털 기기들이 출시되면서 지금은 레트로한 것으로 분류되고 있는 듯 보인다.
현재의 위치는 좀 애매한듯 보이기도 하지만 턴테이블리즘은 네이티브 텅, 추상 힙합과 함께 힙합 내부에서 가장 학구적인 움직임이었던 동시에 현란한 록 기타연주자들의 속주 같은 퍼포먼스가 힙합에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드문 사례라 할 수 있다.
음향 재생기가 악기, 혹은 장르로 불리우는 것 역시 드문 경우이고, DJ 컬쳐를 비롯 현재에도 알게 모르게 그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는 점에 있어 이는 하나의 유산처럼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고 단순히 과거의 유물 정도로 치부하기에는 여전히 수많은 디제이들이 턴테이블로 음악을 재생한다.
◆ 한상철 밴드 ‘불싸조’ 기타리스트
다수의 일간지 및 월간지, 인터넷 포털에 음악 및 영화 관련 글들을 기고하고 있다. 파스텔 뮤직에서 해외 업무를 담당했으며, 해외 라이센스 음반 해설지들을 작성해왔다. TBS eFM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