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최대 득표율로 5선 성공
스탈린 ‘29년 집권’ 기록 넘어서
“러, 더 강하게” 서방 분열 고삐
이미지 확대
엄지 든 현대판 ‘차르’
15~17일(현지시간) 치른 대선에서 승리를 확정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8일 모스크바에 있는 선거 본부에서 엄지를 들어 보이고 있다.
모스크바 AFP 연합뉴스
현대판 ‘차르’(황제)로 불리는 블라디미르 푸틴(72)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5~17일 열린 대선에서 역대 최고 지지율로 5선을 확정하며 사실상 종신집권의 길로 들어섰다. 기록적 득표율을 발판 삼아 서방과 대립각을 키우며 신냉전의 기치를 높여 갈 것으로 예상된다.
18일 러시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개표가 99.43% 진행된 상황에서 푸틴 대통령은 4명의 후보 가운데 87.3%를 얻어 당선을 확정 지었다. 2018년 대선 때 자신이 세운 종전 최고 기록(76.7%)을 뛰어넘었다. 러시아가 2022년 2월 ‘특별군사작전’ 이후 점령한 우크라이나 4개 지역의 득표율은 90%를 넘나든다.
투표율도 77.4%로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다. 구소련 시절인 1991년 러시아공화국 대통령 선거의 74.66%를 넘어섰다.
1999년 12월 31일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의 퇴진으로 대행을 맡은 푸틴 대통령은 2000·2004·2012·2018년 대선에 이어 또다시 승리해 2030년까지 ‘집권 5기’를 열었다. 이오시프 스탈린(1879~1953) 구소련 공산당 서기의 29년 집권 기간을 넘어 ‘30년 통치’라는 최장 기록을 세웠다.
이미지 확대
지난 17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전광판에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두 번째) 대통령과 다른 후보들의 사진 아래 득표율이 적혀 있다. 15일부터 사흘간 러시아 연방과 우크라이나 점령지역 등에서 유권자 1억 2000여만명을 대상으로 치러진 대선에서 푸틴 대통령은 역대 최고 득표율로 승리했다.
모스크바 타스 연합뉴스
2020년 7월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 임기를 4년에서 6년으로 늘리고 재선도 가능해진 터라 2030년 대선에도 출마할 수 있다. 84세가 되는 2036년까지 정권을 쥘 수 있어 러시아 황제 예카테리나 2세(1729~1796)의 재위 기간(34년)도 넘어선다.
푸틴 대통령은 17일 모스크바에서 승리 일성으로 “우리 전사들에게 감사하다”며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한 자국 군인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한 뒤 “러시아는 더 강하고 효율적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특히 그는 지난달 사망한 반정부 인사 알렉세이 나발니의 이름을 처음 언급하며 “나발니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그와 서방국 감옥에 있는 러시아인을 교환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나는 동의했다”고 밝히는 등 ‘반(反)푸틴 세력 끌어안기’에 나섰다.
외신들은 푸틴 대통령이 야당과 정적 없이 치러진 대선에서 정부의 투표 개입과 언론의 노골적 협조, 전시 상황이라는 특수성이 더해져 ‘예정된 승리’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이날 CNN방송은 “이렇다 할 반대 세력 없이 단계별로 조직화한 선거로 1인 지배를 연장했다”면서 “야권 후보 대부분이 죽거나 투옥되거나 망명하거나 출마가 금지됐다.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반대 의견 표명이 불법화돼 푸틴 대통령이 별다른 도전을 받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이번 선거 기간 점령지에서 진행된 사전투표에서는 선거요원들이 총을 든 군인과 함께 투명한 투표함을 들고 가정집을 방문해 비밀투표 위반 논란이 불거졌다. 기표한 투표용지를 접지도 않고 그대로 투명 투표함에 넣는 모습도 보였다. 러시아 선거를 감시하는 마지막 시민단체 골로스의 데이비드 칸키야 활동가는 미 정치매체 폴리티코 인터뷰에서 “(구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내 모든 선거를 통틀어 이번 선거가 투명성이 가장 낮았다”고 비판했다.
이미지 확대
지난 17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 러시아 대사관에서 열린 ‘푸틴에 저항하는 정오’ 집회에는 지난달 옥중 사망한 러시아 반정부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의 부인 율리야 나발나야가 참가했다. 그는 집회에서 “투표용지에 남편 이름을 적었다”고 말했다.
베를린 AFP 연합뉴스
BBC방송도 “러시아 당국은 푸틴 대통령의 이번 대선 출마가 ‘국민들의 강한 요청으로 지난해 말 즉흥적으로 결정됐다’고 주장하지만 크렘린이 이런 중요한 일을 우연에 맡길 리 없다”면서 “기름칠이 잘된 언론들이 푸틴 대통령을 ‘최고의 국가지도자’로 치켜세우며 그에 대한 ‘몰아주기’ 분위기를 이끌었다”고 꼬집었다.
여기에 냉전 시절 미국과 세계를 양분하던 ‘소련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국민의 정서도 한몫했다. 푸틴 대통령은 집권 이후 올리가르히(재벌)와 관료 간 정경유착을 일정 부분 끊어 내고 석유·천연가스 사업을 국유화해 국가 경제를 정상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러시아 주민 상당수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를 대체할 지도자가 없다’는 판단에 따라 지지표를 보냈다는 분석이다.
마이클 킴마지 전략국제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과 마리아 리프먼 조지워싱턴대 유럽·러시아·유라시아연구소 객원연구원은 포린어페어스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가 푸틴 1인 독재 체제를 공고화하고 있다”며 “푸틴 한 사람을 중심으로 러시아가 운영되는 ‘푸틴주의’가 푸틴 대통령의 임기보다 오래 지속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미지 확대
이런 상황에서 푸틴 대통령은 압도적 지지율을 바탕으로 외교적·군사적 고립을 타개하고자 서방을 분열시키는 데 더욱 고삐를 죌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당선 직후 미국과 유럽연합(EU)을 향해 “러시아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군사동맹의 직접 충돌은 세계 3차대전에서 불과 한 걸음 떨어졌음을 뜻한다”며 “누구도 이 시나리오를 원치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선 직전인 지난 13일 공개된 리아노보스티통신 인터뷰에서도 “러시아는 항상 핵무기를 사용할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서방 전문가들은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체 영토의 20%를 점령한 현 상황을 유지하면서 서방의 ‘약한 고리’로 평가되는 헝가리 등 친러 성향 국가들을 우군으로 모을 것으로 내다본다.
푸틴 대통령 통치의 변곡점은 올해 11월로 다가온 미국 대선이다. 미 콜로라도광업대의 켄 오스굿 교수는 “(푸틴 대통령에게) 가장 크고 중대한 와일드카드는 이번 미국 대선에서 벌어질 일”이라며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즉각 종전을 주장해 왔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미국이 원조를 철회하고 우크라이나에 (휴전) 협상을 압박한다면 이는 푸틴 대통령의 승리를 의미한다”며 “현재 점령 중인 영토만 가져도 푸틴 대통령은 이걸 승리라고 대내외에 주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류지영·최영권 기자
2024-03-19 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