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독자위원회 1월 정기회의
새해 첫 신문 1면 톱으로 정치기사 아닌 ‘반려시대’ 올려 신선
‘기로에 선 K반도체’ 기획은 입체적인 접근과 전달로 잘 읽혀
대통령의 특사, 본질적 문제보다 여야 불균형에만 초점 맞춰
늘어나는 미디어 이슈를 깊이 있게 다룰 미디어 전문기자 필요
경향신문 독자위원회가 지난 4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2023년 1월 정기회의를 열었다. 김춘식 위원장(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주재로 열린 회의에 김나리(미디어인큐베이터오리 대표), 박영흠(한국언론진흥재단 연구위원), 신지영(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표미정(동명여고 수학교사) 위원이 참석했다. 곽경란(법무법인 지평 변호사), 오지혁(청년기후긴급행동 공동대표), 윤희웅(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 위원은 서면으로 의견을 냈다. 경향신문에서는 김준기 뉴스콘텐츠부문장이 함께했다.
회의에서는 송년·신년 기획을 놓고 집중적인 토론이 있었다. 지난 한 해를 정리하고 새로운 해 우리 사회의 의제를 제시하는 의미 있는 콘텐츠들이 많았다는 평가가 나왔다. 단순한 지적과 소개를 넘어 대안을 제시하고 사회적 담론으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지난해 말 특별사면의 문제점에 대해 좀 더 명확한 비판이 필요했다는 지적이 있었다. 최근 늘어나는 미디어 관련 이슈를 심층적으로 다룰 미디어 전문기자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김춘식 = 각종 송년·신년 기획을 다수 선보였다. 그중 <키워드로 본 사건사고 1년>이 인상적이었다. 기사가 다룬 안전불감증, 젠더폭력, 유권무죄, 불통, 반노동 등 5개 주제는 한국 사회가 당면한 중요한 이슈들이다. 이 이슈들은 앞으로 남은 윤석열 정부 4년 동안에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단순한 지적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관련 집중기획이나 탐사보도를 통해 보다 심층적으로 다뤄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된다.
윤희웅 = 송년기획 <기로에 선 K반도체>는 심층적이고 입체적인 접근과 전달이 훌륭했다. D램, 파운드리, 팹리스 등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하고 각국의 기업 순위, 규모에 대한 정보까지 담아 독자들의 이해를 높이고자 한 점이 평가된다. 미·중 반도체 패권경쟁 중 한국이 취해야 할 전략에 대한 고민도 담았다. 그래픽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극단의 한국정치> 신년기획은 현재 한국 정치의 문제점을 잘 지적했다. 깊이도 있고, 여러 인터뷰도 담아 애쓴 흔적이 보인다. 다만 텍스트 위주로만 전달된 것이 아쉽다. 정치혐오, 정치대립이라는 주제는 이미 독자들이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사안이어서 통계 등을 가미했다면 문제의식이 더 잘 전달됐을 것이다.
신지영 = 신년기획 <반려시대, 누구랑 사세요?>와 <남과 함께 사는 100만>은 혼자 오래 사는 요즘 시대에 연대를 통해 어떻게 고독함을 극복할 수 있는지 모색하는 기사들이다. 비친족 가족은 급증하는데 정책이나 제도적 지원은 뒷걸음친다는 걸 잘 짚었다. 신년기획 <다시 만난 2030 자낳세 보고서>는 경향신문이 2년 전 창간기념 기획으로 2030세대의 투자 열기를 조명했던 ‘자본주의가 낳은 세대(자낳세)’ 시리즈의 후속인데, 당시 기사의 주인공들이 경기 침체 시기에 어떻게 투자하고 있는지 추적해 보여준 재미있는 기사였다.
표미정 = 청소년 한부모들의 사연을 다룬 송년기획 <나, 어린, 엄마>는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이 기사가 나온 날 다른 면에는 <10월 아기울음 뚝, 확 가팔라진 인구절벽>이라는 기사가 있었다. 인구가 줄어든다고 난리인데 소중한 생명을 키우는 청소년 한부모에게 체계적 지원을 못해주는 우리 사회 현실이 씁쓸했다. 매년 1000명 이상의 여성 청소년이 아이를 낳고 있는데, 이를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보고 종합적 대책이 있어야 한다. 현재 있는 지원책도 여러 곳에 분산돼 있다. 기사에서 청소년 한부모에 대한 지원책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알려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지난달 31일자 <경향신문 선정 올해의 인물-우영우>도 의미있는 기사다. 특히 ‘소수자에 햇살 자폐 스펙트럼 변호사, 드라마에 열광 현실의 장애인엔 냉담’이라는 부제가 기사의 의미를 잘 표현해준 것 같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시위에 대해 오세훈 서울시장은 더 이상 관용은 없다고 몰아붙이는데, 실제로는 장애인들이 요구한 예산이 거의 반영되지 않아 이런 사태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외롭게 싸우고 있는 이들의 상황에 대해 세심하게 배려하며 작성된 기사가 독자들에게 장애인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박영흠 = 경향신문의 올해 첫 신문인 2일자 1면 머리기사로 정치기사가 아니라 <반려시대> 신년기획을 올린 것이 신선했다. 많은 언론사들이 신년기획을 정치 중심으로 했는데 경향신문은 생활밀착형 이슈를 제시해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신년기획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의미나 통찰을 주어야 한다. 아직은 시리즈 시작 단계여서 단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렵지만 이 기획이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을 어떻게 치유해야 할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로 이어졌으면 한다. <극단의 한국정치> 신년기획은 한국 언론 중 정파성에서 가장 자유로운 언론 중 하나인 경향신문이 잘 다룰 수 있는 주제다. 그런데 많은 정치인들 얘기를 담았지만 심도 있는 논의까지 들어가거나 새 어젠다를 제시하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곽경란 = 윤석열 대통령의 특별사면에 대한 관점이 다소 아쉽다. 사면은 행정과 사법이라는 제도의 한계, 가령 부당한 기소와 법원의 오판을 치유하는 정치적 행위이다. 그렇다면 이런 기능에 걸맞은 것이었는지 지적하는 게 사면을 평가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번 사면에 대해 경향신문은 여당 인사와 야당 인사의 균형을 맞추지 않아 잘못됐다고 보도했다. <‘국민통합’ 아니라 ‘여권통합’ 특별사면> 기사가 대표적이다. <사면 불공정의 법칙> 기사도 마찬가지다. 사면은 유죄가 확정된 사람들 중 일부에 대해서만 실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불공정하다. 따라서 이번 특별사면에 대해 균형이나 공정을 갖추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것은 사면에 대한 정확한 비판이라 보기 어렵다. “김경수 전 경남지사는 사면 거부 의사를 밝혔는데도 정부가 사면 대상에 포함시켰다”는 지적 역시 아쉽다. 사면은 당사자의 신청에 따른 것이 아니다. 김 전 지사가 사면을 스스로 거부하는 맥락을 들춰서 지적하는 게 좋았을 것이다. 최근 공개된 드라마 <더 글로리>에 대해 이례적으로 혹평했다. 언론사의 예술 작품에 대한 평가는 객관적이고 대중적이어야 한다. 영화 등 예술 작품에 대한 기사는 독자가 직접 볼지 말지를 판단하는 1차 자료이기 때문이다. 콘텐츠를 평가할 때는 기자 개인의 개성보다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안목으로 접근해주길 기대한다.
김나리 = 여성서사 아카이브 플랫팀이 지난달 24일자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의 칼럼 <마트가 아니라 사람이 쉬었다>를 인터랙티브 콘텐츠로 재구성한 기사가 감동적이었다. 강렬한 메시지를 친근한 언어로 전달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봐야 하는지 이야기하는 좋은 콘텐츠다. 소셜미디어에서도 ‘이게 옳다’ ‘그들도 쉬어야 한다’ 등 훈훈한 반응이 상당했다. 신문 지면을 꼼꼼히 보지 않는 대중들에서도 많은 관심과 유의미한 토론을 이끌어냈다. 지난달 8일자 <작년 일자리 85만개 늘었는데…30대 남성 일자리는 줄었다> 기사는 설명이 부족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분석이 충분하지 않아 물음표가 남는 기사였다. 경향신문은 이란 ‘히잡 시위’ 관련 보도를 한국 언론 중 가장 열심히 하고 있다. 관련 기사가 39개이고 하나하나 퀄리티도 높다고 평가한다.
오지혁 = 한국전력의 적자 위기에 대한 분석이 아쉬웠다. <한전 회사채 발행 늘리지만 ‘위기는 여전’> 기사에서 간단한 이슈 브리프가 이뤄졌지만 이번 사태의 핵심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과 경향신문의 입장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기후·에너지 시민단체들은 최근 원가가 급등한 화석연료의 수입을 한전 적자의 주원인으로 짚고 있고, 회사채 발행을 늘리는 것은 근본 해법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정부가 한전의 적자 위기를 미봉책으로 해결하는 것을 넘어 에너지 전환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필요해 보인다
윤희웅 = 정부의 공공부문 인력 감축 결정과 관련해 지난달 27일자 1면, 경제면, 사설 등에서 인력조정이 주로 하위직의 피해로 돌아갈 것이라는 우려의 시각을 전했다. 기사에 노동단체의 반박도 담았다. 이 사안을 단지 정부와 노동단체의 대립구조만으로 보기보다는 우리 사회의 공공부문을 바라보는 시각의 충돌, 개혁의 필요성 및 그 과정에서 약자 보호 방안 등에 대해 종합적으로 접근했다면 다른 미디어와 차별화되는 기사가 됐을 것이다.
신지영 = 지난달 21일자 엄청나 농민·전국쌀생산자협회 정책위원장 인터뷰 기사에는 농업 관련 전문용어들이 많이 나오는데 지면 한쪽에 별도 박스로 용어를 정리했다. 인터뷰 본문에는 관련 용어를 하이라이트 처리해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해줬다. 지면에 기사형 광고가 나올 때가 있는데 상단에 흐릿하게 ‘advertorial page(어드버토리얼 페이지)’로 표시돼 있다. 기사형 광고인지 인식하기도 어렵고 어드버토리얼 페이지가 무슨 말인지 모르는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독자들이 기사형 광고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박영흠 = 최근 정권과 언론의 관계가 불편해지면서 MBC, YTN, TBS 등 미디어 관련 사회적 현안이 많아지고 있다. 경향신문 신년 여론조사에서도 언론의 자유 후퇴에 대한 우려를 제기하는 시민들이 많았다. 그런데 경향신문의 미디어 관련 기사는 양적으로도 부족하고 심도 있는 기사도 없다. 경향신문도 미디어 전문기자를 양성할 필요가 있다.
김춘식 = 지난달 13일자 홍기빈의 <산업사회의 정치 혁신, ‘300’이 할 수 있나> 칼럼은 국회가 정치혁신을 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면서 능력에 비해 과중한 중요성을 갖는 권력들을 기능에 따라 과감하게 분권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4일자 이진우의 <포스트의 시대정신과 자유민주주의> 칼럼은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자유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뀐 상태에서 자유와 안전의 지속 가능성이 과제라고 적었다. 19일자 박원호 칼럼 <선거제, 단순함의 미덕을 넘어>는 국회 결선투표제 도입을 제안했다. 세 칼럼 모두 단순한 비판이나 진단을 넘어 대안을 제시한 것이 인상 깊었다. 스트레이트 중심의 파편화된 기사를 넘어서고, 전문가적인 식견과 대안을 제시하는 접근이 경향신문의 색깔을 제대로 드러내는 길이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