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는 언제나 갑자기 찾아온다. 2년 넘게 이어져 온 코로나19 팬데믹은 지난여름을 기점으로 ‘엔딩’을 맞았다. 무언가를 꽃피우게도, 시들게도 했던 시간이 지나면 무엇이 찾아올까. 전환기의 2022년 대중문화계에는 두고두고 기억될 만한 순간들이 있었다. 걸그룹이 가요계를 호령했고, 한국의 콘텐츠는 물론 배우까지 세계 무대에서 놀라운 성취를 이뤘다. 피튀기는 경쟁에 돌입했던 콘텐츠 업계는 지각변동을 맞았다.
“내 장점이 뭔지 알아? 바로 솔직한 거야”…가요계 호령한 걸그룹들
‘걸그룹 천하’보다 2022년 가요계를 잘 설명하는 말이 있을까. 올해 국내 음원 차트는 1년 내내 2~4세대 걸그룹들이 점령했다.
루키들의 활약이 특히 거셌다. 지난해 12월 데뷔한 아이브는 ‘러브 다이브’, ‘일레븐’ 등 내는 곡마다 줄줄이 히트를 쳤다. “내 장점이 뭔지 알아? 바로 솔직한 거야”(‘애프터 라이크’ 중)로 대변되는 아이브의 당당한 매력은 단숨에 대중을 사로잡았다. 지난 5월과 7월 각각 데뷔한 르세라핌과 뉴진스는 등장과 동시에 4세대 대표 걸그룹 대열에 합류했다. 방탄소년단(BTS) 소속사 하이브가 내놓은 두 그룹은 ‘피어리스’ ‘안티프래자일’(르세라핌), ‘하입 보이’ ‘어텐션’(뉴진스) 등 잇따라 히트곡을 내며 걸그룹 천하를 이끌었다. 지난달 ‘2022 멜론 뮤직 어워드’가 기존의 성별 구분을 없애고 ‘올해의 신인’으로 뉴진스와 아이브를 선정한 것은 걸그룹 전성시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베테랑들의 활약도 빛났다. 2000년대 후반~2010년대 초반 전성기를 누린 2세대 걸그룹도 대거 컴백했다. 올해로 데뷔 15년을 맞은 소녀시대는 5년 만에 정규 7집 앨범을 내고 ‘완전체 활동’을 했다. 같은 해 데뷔한 카라 또한 7년 만에 음반을 내고 무대에 섰다.
걸그룹의 활약은 국내 음반 산업의 대성황으로 이어졌다. 써클차트에 따르면 올해 실물 앨범 판매량은 8000만장을 돌파, 역대 최고치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전년 동기 대비 약 2000만장 증가한 수치다. ‘밀리언셀러’(앨범 100만장 이상 판매) 타이틀은 이제 보이그룹의 전유물이 아니다. 트와이스, 아이브, 에스파 등이 100만장 이상 앨범을 팔았다. 블랙핑크가 지난 8월 발표한 정규 2집 <본 핑크>는 240만장 판매고를 기록했다.
데뷔 7년차로 세계적 인기를 구가하는 블랙핑크는 역사적인 기록을 잇따라 갈아치웠다. 정규 2집은 미국 빌보드 메인 앨범차트 ‘빌보드 200’과 영국 오피셜 앨범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했다. 모두 K팝 걸그룹으로는 처음이다.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영화 ‘헤어질 결심’의 성취
<헤어질 결심>은 2022년 한국 영화의 놀라운 성취다. 산에서 추락해 사망한 남성의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 해준(박해일)이 사망자의 아내인 서래(탕웨이)에게 끌림과 의심을 동시에 느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는 경찰로서의 자부심 대신 서래를 향한 사랑을 택했음을 고백한 뒤 해준의 대사다. 영화는 이밖에도 “마침내”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등의 수많은 명대사를 남겼다. 중국인 서래가 사용한 적확하지만 일상에서 잘 쓰지 않는 표현들은 ‘헤결 앓이’를 하는 관객들 사이에서 ‘밈’이 됐다. 올해 가장 ‘N차 관람’ 열풍이 뜨거웠던 영화다.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로 제75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박 감독과 여러 편의 영화를 함께 만들어 온 정서경 작가도 이 영화로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배우 이정재의 성취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9월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으로 미국 방송계 최고 권위 에미상의 남우주연상을 아시아 배우 중 처음 받은 데 이어 <스타워즈> 새 시리즈에 합류했다. 8월에는 감독 데뷔작인 <헌트>가 호평 속에 400만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범죄도시2>는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국내 극장가에서 1000만 관객을 달성했다. 극심한 침체기를 겪던 극장가가 완전히 부활할지 기대를 모았다. 이어 최동훈 감독의 <외계+인> 1부, 한재림 감독의 <비상선언>, 김한민 감독의 <한산: 용의 출현> 등 거대 예산을 투자받은 영화가 줄줄이 개봉했지만 기대만큼 관객을 모으지는 못했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올 한 해 작년보다는 관객수가 크게 늘었지만 코로나19 이전 관객수를 회복하지는 못하고 있다. 지난 5~6월의 관객수는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과 비교했을 때 각각 동월 대비 89.8%(773만5106명), 94.0%(934만9643명)까지 회복한 듯 보였으나 10~11월 관객수는 58.0%(394만1739명), 50.5%(347만4594명) 수준으로 다시 줄어들었다. 다만 연말에 <해운대> <국제시장> 등 ‘천만 영화’ 두 편을 만든 윤제균 감독의 뮤지컬 영화 <영웅>과 외국 영화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모은 <아바타>의 속편 <아바타: 물의 길>이 개봉하면서 관객들이 극장으로 돌아올지 주목된다.
“아, 괜찮습니다. 저는 그냥 보통 변호사가 아니니까요”…올해의 드라마 ‘우영우’
지난 6~8월 방송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올해 최고의 드라마로 꼽힐 만하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천재 변호사 우영우(박은빈)는 대중을 사로잡았다. 신생 채널 ENA에서 방송된 신인작가 문지원의 드라마가 신드롬을 일으켰다. 넷플릭스 비영어권 콘텐츠에서 6주간 글로벌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천재 자폐 장애인’이라는 고정관념을 반복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자폐 장애인의 모습을 세심하게 재현하는 한편 장애인과 비장애인 주변인의 다양한 관계를 보여줘 기존 장애인 서사보다 한 발짝 나아갔다는 평가를 받았다.
우영우의 사수이자 시니어 변호사인 정명석(강기영)은 처음에는 우영우에게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채용을 반대하지만 같이 일하며 우영우를 점차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우영우에게 “외부에서 피고인 피해자 만나는 거 어려워. 그냥 보통 변호사들한테도 어려운 일이야”라고 말했다가 “미안해요. 그냥 보통 변호사라는 말은 좀 실례인 것 같다”라고 사과한다. 이에 우영우는 “아 괜찮습니다. 저는 그냥 보통 변호사가 아니니까요”라고 대꾸한다.
올해 전반기에는 <나의 해방일지> <우리들의 블루스> 등 잔잔한 드라마가 인기를 얻었다. <나의 해방일지>는 <또 오해영> <나의 아저씨> 등을 흥행시킨 박해영 작가의 작품이다. 경기도 시골마을에 사는 염씨 삼남매의 일상을 그렸다. 극중 매일 혼자 술을 마시는 구씨(손석구)에게 염미정(김지원)이 “술 말고 할 일 줘요? 날 추앙해요.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라고 한 대사는 다소 낯선 단어인 ‘추앙’을 유행어로 만들었다. 하반기에는 <천원짜리 변호사> <재벌집 막내아들> 등 ‘사이다’ 드라마들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내일 봬요, 누나”…‘환승연애’와 OTT 지각변동
2022년은 온라인스트리밍서비스(OTT)의 업계의 지각변동이 일어난 해다. 코로나19의 대유행과 함께 콘텐츠 소비 방식의 주류가 된 OTT는 지난여름 엔데믹 이후 가입자가 줄면서 경쟁도 치열해졌다.
글로벌 1위인 넷플릭스가 굳건히 버티고, 디즈니플러스 등 해외 OTT가 국내에 속속 진출하는 가운데 ‘토종 OTT’라 불리는 티빙과 웨이브, 왓챠, 쿠팡플레이, 시즌 등이 각축전을 벌였다.
가장 앞으로 치고 나온 것은 CJ ENM의 티빙이다. 티빙의 오리지널 콘텐츠 <환승연애> 시리즈는 티빙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일등공신이다. 헤어진 연인들이 한 집에 모여 사랑을 찾는 이 프로그램은 연애 리얼리티의 홍수 속에서도 섬세한 연출로 ‘과몰입러’들을 양산했다. “내일 봬요, 누나.” 지난 7~10월 방영된 <환승연애 2>에서 출연자 정현규가 헤어진 연인 때문에 힘들어 하는 또 다른 출연자 성해은에게 ‘직진’하며 내뱉은 이 말은 온라인에서 크게 유행하며 각종 패러디를 낳았다.
티빙은 KT의 시즌을 흡수 합병했다. 이로서 단순 합계 기준 560만명에 이르는 가입자를 확보해 웨이브(430만명)를 제치고 국내 OTT 1위에 올라섰다. 토종 OTT의 원조 격인 왓챠의 입지는 흔들리고 있다. 왓챠는 영화제 수상작이나 다양성 영화를 수입해오며 차별화를 꾀해왔지만 지상파·케이블 방송국이나 대기업을 배경에 둔 경쟁사들에 밀렸다. 수차례 매각설에 휩싸인 왓챠는 최근 LG유플러스가 인수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새해를 앞두고 OTT들은 국내외 기업을 가리지 않고 대규모 투자를 통한 오리지널 콘텐츠 강화를 외치고 있다. 티빙과 웨이브가 각각 파라마운트+와 HBO맥스의 작품을 독점 제공하는 등 수급 경쟁도 치열하다. 시청자 확보의 승패는 매력적인 오리지널 콘텐츠에서 갈릴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