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연차들 속앓이 ‘정신건강 비상’
한 달 사이 20·30대 잇따라 사망
“업무 많아 힘들다” 마지막 메시지
악성민원 경험 90%가 10년차 미만
민원 상급자 찾으면 찍힐까 걱정
휴직 원해도 결국 동료가 떠맡아
|
|
“악성 민원인이 전화를 끊지 않고 ‘떼’를 쓰면 상사도 결국 민원인에게 맞춰 주라고 하는 게 전부일 뿐 조직이 보호해 준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근무 첫해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로 일상이 피폐했다. 주 7일 일하며 하루 50건이 넘는 전화를 받았는데도 정신과 상담은 생각조차 못 했다.”
지방의 한 세무서에서 9급 공무원으로 일한 지 3년이 된 A씨는 첫 출근 이튿날 욕설 섞인 민원 전화를 받았던 경험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전임자에게 제대로 된 인수인계를 받지 못한 채 자료부터 살펴야 했던 A씨가 ‘세금이 왜 이렇게 많이 나왔느냐’며 화를 내는 민원인에게 답변을 제대로 못 하자 욕설부터 날아들었다고 한다.
최근 한 달 새 저연차 공무원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건이 잇따르면서 이들의 정신건강에 경고등이 켜졌다. 특히 2030세대 공무원들은 업무와 조직에 적응해야 한다는 부담에 정신적 고통을 털어놓지 못한 채 ‘속앓이’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5일 경기 김포에서 30대 공무원이 악성 민원에 시달리다가 극단적 선택을 한 지 약 2주 만에 경기 남양주시청 9급 공무원 B씨도 같은 선택을 했다. 신규 발령을 받은 지 3개월 된 새내기 공무원이었던 B씨는 지난 1월부터 개발행위 인허가 업무를 맡았다. B씨의 휴대전화에는 “업무가 많아서 힘들다”는 내용의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저연차 공무원들은 B씨 일이 남의 일 같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인천에서 근무하는 3년차 C씨는 26일 “민원인이 오면 응대하거나 전화를 받는 건 막내의 몫”이라며 “뿐만 아니라 잡다한 업무까지 막내들이 맡아 하는데 선배에게 고충을 토로해도 ‘우리 땐 더 심했다’는 대답이 돌아오곤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민원인이 과장, 국장을 쫓아가는 날엔 우리가 제대로 응대를 못 한 것처럼 보일까 봐 가시방석”이라고 호소했다.
주민자치센터에서 일하다 중앙부처로 넘어온 주무관 D씨는 “기초지자체 공무원은 입사하면 바로 주민센터에 배정되는데, 저연차 중에서도 여성 직원을 민원 응대 자리에 앉혔다”며 “여성 공무원에게 더 심하게 민원을 넣는 경향이 있어 자리를 옮길 때마다 후임으로 남자 직원을 뽑고 가는 게 최선의 대응이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이 지난해 7061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공무원 악성 민원 실태조사’에 따르면 근무 연수 20년 이상 공무원 중 ‘악성 민원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한 공무원은 74.3%였다. 특히 5년 미만 86.9%, 5~10년 91.1% 등 저연차에서 두드러졌다. 직급이 낮을수록 악성 민원인 응대 이후 ▲집중력 감소 등 무기력함 ▲퇴근 후에도 근무 중의 힘들었던 감정 지속 ▲민원인에 대한 두려움을 크게 느끼는 것으로 조사됐다.
김정채 공노총연맹 사무총장은 “직급이나 연차가 낮은 공무원이 민원 창구에 상대적으로 많다 보니 악성 민원 노출 빈도나 타격이 더 클 수밖에 없다”며 “악성 민원이나 업무가 과도해 휴직을 하려 해도 그만두면 동료가 자기 일을 떠맡는 구조라 연차가 낮을수록 휴직이나 상담을 활용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인사혁신처가 진행한 국가공무원 감정노동 실태조사에서도 악성 민원인 횡포에 ‘개인적으로 참는다’는 응답이 46.2%로 가장 많았다. ‘동료와 상담을 한다’고 응답한 공무원은 21.5%, ‘상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응답은 16.4%에 머물렀다. 신체·심리적 질병에 대해 ‘아무 조치를 하지 않는다’는 공무원이 61.1%로 가장 많았고 ‘병가를 사용한다’고 답한 공무원은 11.3%에 불과했다.
세종 곽소영 기자·부처종합
2024-03-27 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