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사후 1년, 일본의 현주소
“현재 기시다 내각은 아베 시대의 전환이 아닌 계승입니다.”
일본 정치·행정학자인 마키하라 이즈루(56) 도쿄대 교수는 지난달 26일 도쿄대 연구실에서 열린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베 신조 전 총리 사후 1년 일본의 현주소를 진단했다.
오는 8일이면 일본 헌정사상 최장수 총리를 지냈던 아베 전 총리의 1주기를 맞는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해 7월 8일 참의원(상원) 선거 유세 중 전직 해상자위대원 야마가미 데쓰야의 총에 맞아 숨졌다.
아베 전 총리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지만 일본 최고의 실력자였던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일본 곳곳에 남아 있다. 현재 엔화 가치 하락의 근본적 원인인 아베노믹스, 자위대의 존재를 명시하는 내용의 개헌, 방위력 강화 등은 그가 남긴 대표적 정책이다.
마키하라 교수는 “지금도 자민당 내에선 아베 전 총리의 정책 등을 부정하기 어려운 분위기”라며 “다만 자민당은 서서히 지지를 잃고 있다”고 분석했다. 마키하라 교수는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도호쿠대를 거쳐 도쿄대 첨단과학기술연구센터 교수직을 맡고 있으며 도쿄·아사히신문 등에 일본 정치 비평 칼럼을 쓰고 있다.
-아베 전 총리의 존재감이 여전한 것 같다.“그의 영향력이 지금도 강한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아베노믹스의 부작용으로 엔화 가치 하락 등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지만 벗어나기 쉽지 않다. 정책을 뒤집으려고 하면 아베 전 총리 지지층으로부터 외면받는다. 기시다 내각도 아베 시대를 전환하는 게 아니라 계승할 수밖에 없다.”
-일본 국민이 아베 전 총리를 지지한 이유는 무엇인가.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그를 싫어할 수밖에 없다. 문제가 많으니까. 하지만 일반 국민에게는 결점이 많다는 게 오히려 매력으로 다가온다. 그는 연설도 잘 못했고 영어도 잘하지 않았지만 (총리로서) 완벽하지 않은 보통 사람이란 면모가 사람들에게 기대감을 줬다.”
-한국에서 아베 전 총리의 이미지는 좋지 않다.
“아베 전 총리는 ‘적’을 만들고 이를 이용해 지지율을 끌어올리며 정권을 유지하는 방식을 썼다. 일본 내에서는 진보 세력과 입헌민주당, 언론 등을 적으로 삼아 대립하며 정권을 유지해 왔고 자신의 정치를 위해 내셔널리즘을 이용했다. 특히 미국에 집중하고 한국은 적대적으로 대하며 혐한 감정을 동원했다. 물론 문재인 정부도 일본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이를 이용해 지지층을 유지한 것은 비슷하다.”
-아베 내각과 기시다 내각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아베 전 총리는 인터넷 혐한 세력의 지지를 받았지만 혐한이 반드시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보여 줬다. 한일 관계가 좋아져 기시다 내각의 지지율이 오히려 상승하지 않았나. 일본 젊은층은 한국 문화를 좋아하고 따라 하고 싶어 한다. 이런 점을 보면 기시다 총리는 확실히 우파는 아니다. 이뿐만 아니라 기시다 내각의 지지율이 하락한다고 해도 30% 이하로는 떨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자민당을 지지하는 골수 지지층이 그만큼 된다는 이야기다. 이 골수 지지층이 아베 전 총리의 우파 이념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아베 전 총리의 영향력이 지금도 강한 이유는 무엇인가.
“자민당 내 최대 계파는 여전히 아베파다. 아베 전 총리가 남긴 것들을 부정하는 것은 곧 최대 계파인 아베파와 척지겠다는 의미다. 나와 반대되는 쪽은 적, 적은 곧 야당의 편, 자민당 내에서 반대 세력은 곧 야당의 동료라는 게 아베 전 총리의 구분법이었는데 그런 정치적 유산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아베 전 총리 같은 강한 리더십이 일본에서 요구하는 리더십인가.
“그렇진 않다. 다만 2012년은 민주당에서 자민당으로의 정권 교체 시기였기 때문에 아베 전 총리가 내세운 ‘싸우는 리더’가 먹혀들어 총리직에 올라 장기 집권했다. 사실 현재 일본은 누가 되더라도 자민당 내 리더를 뽑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 파벌의 인정을 받은) 유화적인 사람이 총리가 될 수밖에 없다. 기시다 총리도 각 파벌의 인정을 받지 않으면 다시 총리가 되기 어렵다.”
-기시다 총리의 장기 집권은 가능한가.
“기시다 총리는 무엇을 하겠다는 게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결단력이 부족하다. 대대적으로 내세운 저출산 대책은 사실 아베 전 총리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다만 우크라이나 사태, 코로나19 등의 위기를 기시다 총리가 어느 정도 방어했다는 인식이 강하다. ‘포스트 기시다’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기시다 총리가 직을 더 이어 갈 가능성이 있다. 경쟁자인 고노 다로 디지털상은 마이넘버카드(일본식 주민등록증) 오류 문제로 흠집이 났다.”
-기시다 총리가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을 치를 수 있을까.
“중의원 임기의 절반도 지나지 않아 ‘명분’이 없다. 기시다 내각에 위기를 낳을 만한 문제들도 남아 있다. 마이넘버카드 문제도 그렇고 저출산 대책과 방위비 증액을 위한 ‘증세’가 대표적이다. 자민당은 증세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세금 문제에 극도로 예민한 일본 국민은 자민당이 거짓말을 한다는 불신이 크다.”
-중의원을 해산하고 선거를 치러도 자민당에 승산이 없다는 이야기인가.
“정권 교체가 쉽지는 않겠지만 자민당 의석수는 서서히 줄고 있다. 일본유신회가 득세하는 것은 자민당에 지친 지지층이 옮겨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이 나라가 유지될 수 있을까’란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만을 가진 일본 국민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글·사진 도쿄 김진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