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일본·유럽연합(EU) 등이 수조~수십조원대의 보조금을 투입해 경쟁적으로 반도체 투자 유치 전략을 내세우는 ‘글로벌 반도체 전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정부가 반도체 등 첨단전략산업 분야 투자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지금껏 우리나라는 세액공제 중심으로 반도체 투자 유치 전략을 펼쳤지만, ‘K반도체’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선 직접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정부는 27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한덕수 국무총리 주재로 ‘제5차 국가첨단전략산업위원회’를 열고 ‘첨단전략 산업 특화단지 종합지원방안’ 등을 의결했다. 종합지원방안은 2047년까지 681조원 민간투자 계획에 맞춰 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가 적기에 조성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특히 정부는 경쟁국의 투자 보조금 경쟁 격화를 언급하며 ‘투자 인센티브’ 추가 도입을 검토한다는 방침이다. 보조금 지급 방안을 직접 거론하진 않았지만, 주요국의 보조금 지급 경쟁이 한창인 상황에서 향후 반도체 등 첨단전략산업에 투자하면 보조금 지급을 검토하는 정책 방향 선회를 시사한 것으로 해석된다.
우리나라는 보조금을 직접 주기보다는 감세, 인프라 지원, 국가산업단지 조성 등 간접 지원에 치중해 왔다. 반도체 등 국가전략산업 분야 기업이 설비 투자를 하면 세액공제 비율은 대기업 기준 15%인데 올해만 25%까지 세액을 공제받을 수 있다. 반면 미국은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에 생산 보조금 390억 달러와 연구개발(R&D) 지원금 132억 달러 등 5년간 총 527억 달러(70조원)를 지원한다.
일본은 자국에 공장을 지은 대만 TSMC에 4760억엔(4조 2300억원)을 지급했다. 중국은 35조원 규모의 반도체 육성 펀드 조성에 나섰고, EU는 2030년까지 민관이 430억 유로(62조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과거 보조금 지급은 자유무역 질서를 무너뜨린다는 이유로 글로벌 시장의 ‘반칙’으로 간주됐지만, 미중 패권경쟁이 격화하면서 점점 ‘뉴노멀’이 돼 가는 추세다. 반도체 업계는 이전부터 정부의 보조금 지급을 요청해 왔다. 반도체 산업에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가는 만큼 보조금이 지급되면 원가 부담이 줄어 글로벌 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다는 논리다.
한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보조금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대기업 퍼주기’가 아닌 국가 첨단전략산업 보호와 성장을 위한 국가적 투자라는 인식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반도체 기업의 한 임원은 “미국은 70조원 규모 예산에서 기업 투자 금액의 10% 이상을 보조금으로 주고 일본은 투자액의 40~50%를 보조금으로 지원하고 있다”면서 “반면 우리나라는 반도체 기업 투자분에 대한 15% 세액공제가 전부라 경쟁국에 비해 정부 지원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도 보조금 지급 필요성에 공감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반도체 산업은 자립률이 중요해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을 다루는 기업들이 국내에 있을수록 유리하다”면서 “보조금을 지급하면 대기업을 포함해 중견·중소기업도 외국과 비교해 한국에 투자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해 자립률을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우리나라 반도체의 공급망 자립률은 30% 수준에 불과하다. 공급망 리스크에 취약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보조금 지급은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제고 차원에서 불가피하다”면서 “적어도 일본 수준의 지원은 돼야 한다”고 했다.
정부가 보조금 지급에 신중한 이유는 재원 확보는 물론 특정 재벌과 산업에 대한 특혜 시비가 뒤따를 수 있어서다. 이 때문에 보조금 지급에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보조금을 주더라도 주요국들처럼 수십조원 규모의 지급은 어려운 만큼 지급 대상을 분별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도 뒤따른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국가별로 반도체 기술과 인력에 차이가 있어 보조금 효과가 기대만큼 있을지 아직 불확실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