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여수정 기자│“한국 대중문화는 커다란 역사적 굴곡을 세 번 거쳤다. 민주화는 지금의 한류나 K-POP(케이팝) 붐이 형성된 원인 중 하나다.”
김창남 문화평론가는 9일 오전 새얼문화재단이 인천쉐라톤그랜드호텔에서 진행한 제425회 새얼아침대화에서 ‘한국 대중문화사, 세 번의 굴곡: K-contents의 힘은 어디서 온 것인가’를 주제로 강연하며 이같이 말했다.
김창남 평론가는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신문학과(현 언론정보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6년부터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현재 사단법인 더불어 숲 이사장,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대중문화사’, ‘대중문화의 이해’, ‘나의 문화편력기’, ‘신영복평전(공저)’ 등이 있다.
아래 내용은 9일 김 평론가의 강연을 정리한 내용이다. <기자말>
일제강점기~1950년대는 ‘번안곡의 시대’
1950년대 이전 한국은 서양곡을 일본에서 간접 수입했다. 일본에서 번안한 서양곡을 다시 한국에서 번안하는 식이었다. 예를 들어 1850년 발매된 영국 찬송가 ‘The Lord Into His Garden’은 1910년에 일본에서 ‘새하얀 후지산의 뿌리’라는 추모곡으로 번안됐다. 이후 1925년 한국에서 다시 ’이 풍진 세월을‘이라는 곡으로 바뀌었다.
또한, 구한말 한국 대중음악은 일본 번안곡이 대부분이었다. 실제 당시 시민애창가 23곡 중 15곡이 일본곡이거나 일본노래 번안곡이다. 대표적으로 이수일과 심순애의 ‘장한몽가’가 있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 민요 특징과 일본 ‘연가’ 특징이 합쳐진 대중음악도 나온다. 대표적인 곡이 1932년 발매된 이애리수의 ‘황성옛터’다. 민요는 3박자로 이뤄진다.
연가는 한국에서 신파극으로 연재된 일본소설을 음악으로 재구성한 거다. 보통 일본어로 ‘엔카’라고 한다. 연가는 계이름 7개 중 라·시·도·미·파 등 5개만 사용하는 특징이 있다. 대표적인 곡이 1932년 발매된 이애리수의 ‘황성옛터’이다.
이후 연가 특징은 그대로 유지하지만 4박자로 구성된 ‘트로트’란 음악장르가 생긴다. 1935년 발매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대표적이다.
1950년대 이후부터는 미국 문화를 직접 수입한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 30만명이 한국에 주둔하게 되면서다. 당시 한국 사람들은 팀을 구성해 미군부대에 순회공연을 다녔다.
이들은 팝송을 부르고 영어를 사용하며 미국 문화 흡수력도 뛰어났다. 이들이 향후 방송무대에 진출하며 팝을 가미한 대중음악이 주류로 떠오르게 한다.
이와 함께 미군부대에 댄스홀이 생기고 군 관계자 외 사람들도 출입하게 되면서 댄스홀 열풍도 일어났다.
당시 ‘자유부인’이라는 소설이 인기를 끌며 댄스홀 열풍이 더욱 뜨거워졌다. ‘자유부인’은 정비석 작가가 1954년 쓴 소설이다. 대학교수 부인이 춤에 빠진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60~1980년대는 ‘저항문화 시대’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을 장악한 전·후인 1960년에는 KBS(1961년), 동양방송(1964년), MBC(1969년) 등 주요 방송국이 개소했다.
라디오와 영화도 인기였다. 라디오로 송출된 드라마가 영화로 재구성됐다. 예를 들어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 등이 있다.
당시 듣는 대중음악이 지역과 계층에 따라 달랐다. 트로트는 주로 농촌에서 저학력 서민층이 들었다. 팝은 주로 도시에서 들었고, 고학력 중산층 문화였다.
1970년대 초반에는 포크나 록 음악장르가 등장했다. 팝송을 들으며 자란 세대들이 미국 히피문화의 영향을 받아 머리를 기르고 통기타를 연주했다. 송창식·김민기·이장희·신중현 등이 유명했다.
그런데 1975년에 대중 가수가 대마초를 흡연하다 구속되는 ‘대마초 파동’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김민기의 ‘아침이슬’, 이장희의 ‘그건 너’, 송창식의 ‘왜 불러’, 신중현의 ‘미인’ 등 포크와 록 음악이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또한, The Beatles(비틀즈)의 ‘Revolution’, Queen(퀸)의 ‘Bohemian Rhapsody’ 등 팝송도 금지됐다. 뿐만 아니라 가수 예명도 단속 대상이었다. 예를 들어 멀티김은 김혜자로, 바니걸스는 토끼소녀로 활동해야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초반의 청년문화가 사회에서 퇴출되며 록과 트로트가 섞인 록 트로트가 유행했다.
더불어 유신체제에 저항하기 위한 문화 활동도 늘어났다. 1978년 무렵 대학에는 노래패가 생겼다. 노래패는 주로 대학이나 노동조합 등에서 사회운동을 할 때에 부르는 민중가요를 창작하고 공연하는 동아리를 말한다. 이 기조는 198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1980년대에는 민중문화운동이 확산했다. 민중문화운동은 1970∼1980년대 사이 민중을 문화의 생산과 소비 주체로 두기 위해 진행한 문화운동이다. 민중문화운동을 하던 학생들은 음악을 만들어 테이프에 담았고 공연을 했다.
이들은 큰 인기를 모으며 1990년대 전반기까지 활동했다. 반면, 그만큼 대중가요 검열이 강화됐다. 가수 정태춘은 이에 맞서 가요 검열 철폐 운동을 하기도 했다.
10대들이 시장의 주요 소비층으로 등장하며 문화를 이끌었다. 워크맨이나 나이키 등은 10대 필수품이 됐다. 10대들의 취향에 따라 댄스 음악도 유행했다.
1990년대~현재 ‘민주화에서 비롯한 한류시대 ’
1990년대에는 신세대 문화가 등장하며 10대가 문화 주류로 자리 잡았다. 대표적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이 10대의 큰 지지를 얻었다. 또한, 대중가요 검열과 탄압이 줄어 민중음악을 했던 가수 김광석의 음악이 유행하기도 했다.
민주화 흐름 속에 영화도 급속도로 발전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맞이했고, 멀티플렉스(극장과 식당이나 쇼핑 시설 등 함께 있는 복합 건물)가 등장했다.
2000년대부터는 ‘관객 1000만명 시대’가 도래했다. 박찬욱·김기덕·봉준호 등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작가주의 영화감독도 등장했다. 이에 따라 영화진흥법 등 관련 법이 제정되고 다양성을 확보하며 한류의 기반을 다졌다.
2000년대에는 아이돌 팝 음악이 유행했다. 1세대 아이돌 팝 음악은 기획사가 주도해 제작했다. 기획사는 해외 진출을 목표로 해 전략적으로 아이돌 그룹을 구성했다. 아이돌 그룹에 태국인 등 외국인을 한명씩 포함하는 방식이었다.
한류는 2세대 아이돌 팝 음악으로 정점을 찍었다. 아이돌 멤버들이 예능프로그램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면서다. 유닛활동(그룹의 일부 멤버들이 별개 그룹으로 활동하는 형태)도 늘었다. 동시에 조건 없는 사랑을 주고, 지지하던 아이돌 팬덤도 아이돌의 실수나 잘못은 지적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동시에 해외에서 우리나라 영화나 드라마도 인기를 끌었다. 드라마 ‘대장금’은 이란에서 시청률 90%를 달성했다. 최근에는 한국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드라마 ‘오징어게임’, 영화 ‘기생충’ 등이 흥행했다.
한국 대중문화의 힘은 ‘혼종성·창조성·IT’
한국 대중문화는 기본적으로 일본 문화와 미국 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했다. 또한, 급속한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이 대중문화에 녹아있다.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안에 다양한 시간이 공존한다. 이런 특징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계속 유입된다.
또한,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정신이 한국 대중문화 창조성에 일조했다. 저항문화와 민중문화운동 등으로 한국 대중문화가 풍성해지며 표현 범위가 확장됐다.
더불어 한국에는 정보화 시대에 앞서 IT시대가 있었다. 이런 특징은 한국 대중문화가 해외로 전파되는 밑거름이 됐다.
향후 한국 대중문화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혼종성이나 다양성 등을 정치적으로 억압해선 안된다.
또한, 공공성도 필요하다. 향후 한류 지속성과 확장성 등은 비주류 문화가 얼마만큼이나 성장하는 지가 결정한다. 비주류 문화 발전을 위한 정책과 지원 등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