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안동김씨 세도정치에 대한 다양한 담론이 있어왔다. 필자는 세도정치가 가능했던 안동김씨의 풍수적 뒷심은 어디에서 연유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고려 개국공신인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하는 신 안동김씨(新安東金氏) 중에서도 경복궁 근처의 장의동에 거주하여 속칭 장동김씨(壯洞金氏)라고 불렸던 그들이 세도정치의 핵심이었다.
그들 선대의 선영은 풍산(안동) 소산리에 있는데, 12세인 김번(金?)부터 덕소에 모시기 시작했다. 그의 후손들이 훗날 세도정치의 주역으로 등장하자 김번의 묘소를 대명당 또는 조선 8대 명당의 하나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남양주 덕소의 속칭 석실마을에는 김번을 시작으로 그의 후손들 묘소가 많다. 이 묘역에는 병자호란 때 강경 척화대신으로 이름 높았던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묘소도 있다.
김번은 1498년에 진사에 합격하고 1513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다. 이후 군자감직장과 여러 직책을 거쳐서 평양서윤과 시강원문학 등을 역임했다.
김번의 묘소는 그의 큰아버지인 학조대사(學祖大師)가 소점한 것으로 옥호저수(玉壺貯水)라는 형국명의 명당으로 알려졌다. 이곳은 풍수인들의 필수 간산지로서 필자도 입문시절부터 여러 번 간산하였다. 그러나 김번 묘소는 소지소혈에 불과하다는 것이 필자의 최종적 판단이다. 설령 대명당이라도 김번 묘소는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된 1805년과는 260여 년의 간극이 있으니 풍수적 영향을 미칠수 없다는 생각이다.
기실 석실마을의 주혈은 김번의 아들인 김생해(金生海, 1512~1558) 묘소로 20회절이다, 또한 청음 묘소는 19회절 명당에 자리하고 많은 묘소들이 대부분 명당에 자리하여 훗날 삼수(三壽)·육창(六昌) 등의 인물의 배출과 화직(華職)의 현달을 가능케 했다는 판단이다.
@ 삼수 : 김상헌의 손자인 김수증·김수흥·김수항을 말함.
@ 육창 : 김수항의 여섯 아들을 말함.
그러나 석실마을 서북쪽인 이패동에 김수항(金壽恒, 1629~1689)묘소는 15회절 대흉지에 자리하니 30년 후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그의 아들 김창집을 포함한 3대가 사사(賜死)되는 참변을 당하는데, 이는 김수항 묘소의 영향이 컸을 것이란 판단이다.
원래는 여주 초현리 선영에 있었으나, 김달행 사후 9년에 배위 한산이씨가 별세하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그는 김제겸(金濟謙)의 4남으로 신임사화 때 3대가 사사되고 가솔(家率)이 도처로 유배되는 것을 목격한다. 그가 33세에 세상을 떠난 것은 이러한 참상을 겪은 것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3남을 두었는데, 장남인 김이기와 차남 김이중의 후손들이 조선후기 세도정치의 실세로 등장한다. 그래서 적지 않은 풍객들은 이 묘소를 대명당이라고 꼽아주지만, 이 묘소는 주혈의 여기(餘氣)에 자리하는 5회절 명당이다. 정승은 고사하고 판서도 배출하기 어려운 자리에 불과하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조선후기 세도정치의 핵심인물은 김달행의 아들 3명의 후손들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김달행의 장남. 원래는 부친 묘소 근처에 모셨으나, 이후에 이곳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부친이 일찍 돌아가자 집안이 가난하여 장남인 김이기가 가솔(家率)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혜경궁 홍씨와는 이종(姨從)이었는데, 홍씨의 모친인 이모와 외가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공부에 매진하여 출사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산의 모양으로 판단하는 만두형세로는 김이기의 묘소는 북쪽에 있는 추읍산에서 낙맥(落脈)한 것으로 보이지만, 기실 이곳의 맥로는 그렇게 가까운 곳이 아닌 청룡쪽의 동북방 아주 먼곳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리고 맥로는 봉분의 왼쪽으로 진입하여 30회절의 대명당을 맺는다.
원래는 부친 곁에 모셨으나 사후 33년에 이곳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서흥부사(瑞興府使)를 지냈지만 후손들의 현달로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묘역의 북북서쪽에서 진입한 맥로가 묘소에 정확히 진입하여 29회절의 대명당을 맺었다. 길흉경계선은 좌우로 펼쳐서 묘역 전면의 상당 부분이 모두 명당판에 해당한다. 이 묘소는 아들 김조순 말년에 이장한 것이지만 그의 후손들이 득세하여 세도정치를 하는데 풍수적 뒷심을 주었을 것이다.
김조순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김이기의 장남 김용순(金龍淳, 1754~1823)에게 입적한다. 김유근은 병조판서와 돈령부판사를 역임했고 생부 김조순이 별세한 뒤에는 안동김씨 세도가의 실권자였다.
그는 글씨와 그림, 시조에 모두 능하였으며 문기(文氣)가 넘치는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를 잘 그렸다. 또한 생전의 문장을 집대성한 <황산집(黃山集)>과 회화인 <괴석도(怪石圖)> <연산도(硯山圖)>를 남긴 문화 명류이기도 했다.
다만 김용순과 김유근의 묘소는 원래 여주 효지리에 모셨던 것을 1983년 이장했으니, 지금의 묘소로는 후손들에게 어떤 풍수적 영향을 주었는지 판단할 수 없다.
김명순 묘소는 묘역의 주혈인 21회절, 양부 김이경 묘소는 18회절 대명당에 모셨다. 그러나 지금의 묘역은 30여 년 전에 개발로 이장한 것이니 풍수적 인과관계를 밝히기는 어렵다.
김명순의 3명의 아들은 다음과 같다.
장남 김홍근(金弘根, 1788~1842). 동지부사로 연경에 다녀왔고, 성균관 대사성·이조참판·사헌부 대사헌·홍문관 제학, 공조판서·병조판서를 거쳐서 좌의정을 역임했다.
묘소는 북한의 풍덕에 있다고 한다.
차남 김응근(金應根, 1793~1863).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공조판서·형조판서를 역임했다. 그의 아들 김병시(金炳始, 1832~1898)는 고종 때 충청도 관찰사, 홍문관 제학을 거쳐 육조판서와 판의금부사, 영의정을 역임했다.
삼남 김흥근(金興根, 1796~1870). 순조대에는 이조참판·평안도관찰사·형조판서·좌참찬 등 내외 요직을 역임하고, 헌종대에는 예조판서와 경상관찰사를 지내다 대간의 탄핵을 받아 잠시 유배되기도 했다. 철종이 즉위하면서 한성부판윤으로 등용되었고, 좌의정과 영의정을 역임했다.
@ 석파정(石坡亭, 부암동 소재)은 흥선대원군 별서(別墅,별장)에 딸린 정자로 알려졌으나 원래는 김흥근의 별서였다. 이를 탐낸 흥선은 아들인 고종과 함께 방문하여 하룻밤을 묶었다. 임금이 묵은 곳을 신하가 계속 살 수 없다는 예법에 따라 김흥근은 할 수 없이 이 별장을 흥선에게 양도한 것이다.
김이중(金履中)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조의 깊은 신임을 받아 딸은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되었다. 국구(國舅)로서 30년간 순조를 보필하여 군덕(君德)을 함양시키는 일에 진력하여,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조선말기의 우국지사였던 황현(黃玹)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김조순을 이렇게 평했다. “그는 문장을 잘 짓고 나랏일을 처리하는데 솜씨를 발휘해 후덕하다는 칭송을 들었다. 하지만 그의 자손들은 탐욕스럽고 완고하며 교만하고 사치하여 외척으로서 나라를 망치는 화근이 되었다”. 김조순은 당대 최고의 권력 실세였으나 겸솜과 신중함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충분한 힘과 능력이 있음에도 시대의 부조리와 병폐를 방치하였고, 왕실의 척족(戚族)으로서 자신의 일가를 다스리지 않아 훗날 세도정치의 폐단을 초래하였다.
묘소는 정확하게 21회절의 대명당을 맺었다. 이곳의 풍수파워가 훗날 후손들의 세도정치에 막강한 풍수적 뒷심이 되었다는 판단이다.
김조순의 3명의 아들은 다음과 같다.
장남 황산 김유근은 위에서 설명
차남 취정(翠庭) 김원근(金元根, 1786~1832). 얼마전에 양평 개군면으로 이장했다.
삼남 하옥(荷屋) 김좌근(金左根, 1797~1869)
1834년, 헌종이 7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김좌근의 누나인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 1857)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그는 친정 오빠인 김유근, 동생 김좌근, 6촌인 김홍근 등 친정식구에게 자문을 구하며 수렴청정한다. 그런데 1840년에 김유근, 1842년에 김홍근이 사망하자 김좌근이 안동김씨 세력의 핵심 인물로 부상한다. 김좌근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42세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불과 4년 만에 오늘날의 장관에 해당하는 판서가 된다. 순원왕후의 덕분이었을 것이다. 1841년, 14세가 된 헌종이 친정(親政)을 하면서 척신인 안동김씨를 배제하자 김좌근은 한때 정치적 위기를 맞는다.
1849년, 헌종이 22세에 승하하자 순원왕후는 철종을 양자로 삼아 수렴청정을 재개한다. 이때 김좌근은 반대파를 숙청하고 조정의 요직을 안동김씨로 채우며 본인은 3번이나 영의정을 역임했다. 국가경제와 민생은 파탄났고, 삼정의 문란으로 각기에서 민란이 빈발했으나 그들은 매관매직 등 가문의 영화에만 몰두하였다.
1857년 순원왕후가 승하하고, 1863년 고종이 즉위하자 권력을 장악한 흥선대원군은 안동김씨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지만 김좌근만은 원임대신으로 우대했다. 그가 파락호 시절 김좌근으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좌근과 그의 아들 김병기의 묘소를 찾아갔다.
이곳에 김좌근과 아들 김병기 묘소가 있었는데, 모두 자리가 될 수 없는 흉지이다. 왜냐하면 맥로가 이곳에 머물지 않고 아래에 있는 고택(古宅)으로 진입하여 명당을 맺으니 이곳은 맥로의 면배(面背)의 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김병기(金炳冀, 1818~1875)는 김좌근의 아들로 부친과 함께 세도정치가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그는 김좌근의 8촌 김영근(金泳根, 1793~1873)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생부 김영근의 묘소는 이천 고당리에 있는데 11회절 흉에 걸려서 아들 김병준과 김병기에게 풍수적으로 불리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김복순은 사헌부감찰, 안성군수, 한산군수, 연안부사, 황주 목사를 역임했고, 사후에는 후손들이 현달하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맥로는 전면의 수미(秀美)한 문필봉을 넘어와 묘소로 진입하는데, 묘소의 좌향과 맥로의 진입방향이 다소 어긋나 있다. 21회절 대명당이니 아들이 판서를 역임하고 손자인 김병기가 세도정치의 핵심인물로 활동하는데 풍수적 뒷심이 되었다는 판단이다.
1862년(철종 13) 어느 날, 어전회의에 참석한 삼정승·육판서를 비롯한 대신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어딘가 닮은 얼굴들이 많았다. 영의정 김좌근, 영돈녕부사 김문근(金汶根), 판중추부사 김흥근(金興根), 어영대장 김병기(金炳冀), 이조판서 김병교(金炳喬), 병조판서 김병학(金炳學), 형조판서 김병주(金炳?), 지중추부사 김병국(金炳國), 대사헌 김병필(金炳弼), 대사성 김병시(金炳始)이다. 모두 안동김씨의 부자(父子), 사촌, 숙질 간이다. 권세가들이 좋은 자리를 일족에게 나눠준 사례는 많았지만 이처럼 조정의 고위직을 한 가문이 독점한 것은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소위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국정이 사유화된 것이었다. (김준태 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