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혼란에 세금 인하 등 때 놓쳐”
‘Closed’(문 닫음)라고 적힌 알림판이 걸려 있다. 관광객이 북적이는 이 거리에도 임차료 부담 등으로 문을 닫은 가게들이
생겨나고 있다. 영국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선진국 가운데 가장 먼저 경기 침체의 늪에 빠진 것에
대해 영국 시민들은 정치 혼란 속에 적시에 개혁이 이뤄지지 못한 점을 주요 원인으로 지목했다. 런던=조은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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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 및 전기요금이 1년 만에 무려 3배로 올랐다는 게 믿어지나요.”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스트러턴그라운드 골목. 이곳에서 19년째 미용실을 운영하는 마코 빅토렐로 씨는 4일(현지 시간) “에너지 비용을 충당하지 못해 문을 닫는 가게가 주변에 수두룩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각종 공공기관, 대기업이 모인 핵심 상권이지만 100m 남짓한 거리에 상점 2곳이 폐업한 상태였다. 점포에는 고지서와 우편물만 수북이 쌓여 있었고, 입구에는 노숙자가 누워 있었다.
명품 브랜드들이 플래그십 스토어를 경쟁적으로 냈던 옥스퍼드 거리에도 블록마다 대형 공실이 하나 이상 눈에 띄었다. 한 블록에 공실이 3개나 되는 곳도 있었다. 그 대신 저렴한 임차료로 문을 연 ‘미국식 캔디숍’이 즐비했다. 순찰 중이던 한 경찰은 “(고풍스러운) 매리엇 호텔 1층에 미국식 캔디숍이 있는 게 너무 이상해 보이지 않나”라고 했다.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이 줄줄이 하향 조정되는 가운데 주요 7개국(G7) 중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최악의 경기침체에 진입한 영국을 찾았다. 제러미 헌트 재무장관이 취임 초기부터 경기 침체에 진입했음을 공식 선언하고, 중앙은행이 ‘100년 만의 장기 침체’를 예고한 영국에선 자영업이 경기침체에 가장 심각하게 노출돼 있었다.
자영업자들은 매달 전년 동기 대비 10%씩 뛰는 물가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에너지 가격 급등 외에 정치 리더십의 부재를 위기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정치 혼란 속에 필요한 개혁이 때를 놓쳐 결국 문제가 곪아터졌다는 것이다. 영국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논의를 본격화한 뒤 7년 새 총리가 다섯 번 바뀌었다. 특히 지난해 7월 보리스 존슨 전 총리가 ‘파티 스캔들’로 불명예 퇴진한 뒤 집권한 리즈 트러스 전 총리는 대규모 감세안 발표 실책으로 취임 44일 만에 사임했다. 이후 리시 수낵 총리도 별다른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앨런 소디 중소기업연합회(FSB) 미디어 책임자는 “영국 경제에 지독하게 얽혀 있는 문제(toxic mixed problem)가 한꺼번에 터졌다”고 말했다.
英폐업매장 1년새 50% 급증… “세제-교육개혁해 자영업 살렸어야”
개혁 미루다 곪은 英 경제
번화가 옥스퍼드-노팅힐도 줄폐업
“대기업과 비슷한 법인세율 부담 커
숙련된 직원 못 구해 더 힘들어”
금리까지 오르며 가계 소비가 얼어붙어 지난해 폐업한 상점이 전년 대비 50% 늘었다. 런던=게티이미지
영화 ‘노팅힐’의 촬영지로 관광객이 많이 찾아 상권이 안정적이라는 영국 런던 노팅힐도 경기 침체 여파를 피하지 못했다. 5일(현지 시간) 오전 영화 속 주인공이 운영하던 ‘노팅힐 서점’ 양쪽에는 문을 닫은 상점이 2곳 있었고 서점 옆 건물엔 점포를 내놨다는 ‘For Sale’ 팻말이 걸려 있었다. 건너편에도 점포 3곳이 공실이었다.
이 지역에서 주택 청소를 하는 잭 바디아 씨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길가에서 잠자는 노숙인이 늘었다”며 “아버지가 일하던 때도 어려웠다고는 하지만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다”고 말했다. 1970년대 두 차례 석유파동으로 물가가 급등하며 경기 침체가 닥치고 공공서비스마저 파업으로 마비됐던 ‘불만의 겨울’보다 경기가 더 좋지 않다는 얘기다.
○ “교육 개혁해 숙련 인력 키웠어야” 탄식
영국 폐업 규모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초기보다 심각하다. 영국 소매업연구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문을 닫은 매장은 1만7145곳으로, 1년 전 1만1449곳보다 약 50% 늘었다. 코로나19 확산 첫해인 2020년(1만6045곳)보다도 많다.
현장에서 만난 자영업자들은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생활물가는 물론이고 에너지 가격마저 급등해 복합적인 난국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3분기(7∼9월) 영국 국내총생산(GDP)은 전 분기 대비 0.3% 감소해 주요 7개국(G7) 중 가장 낮은 성장률을 나타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누적 성장률도 G7 중 가장 낮다.
이들은 자영업자 법인세를 정부가 일찍 개편해 경영 부담을 줄여줬어야 했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과 달리 영국 자영업자가 부담하는 세율은 대기업과 비슷한 수준이란 얘기다. 영화 노팅힐에 등장하는 서점을 실제 운영하는 제임스 메이린 씨는 “장사하는 사람들은 법인세를 거의 임차료 절반 규모로 부담하고 있다”며 “대기업과 동일하게 내도록 돼 있는 자영업자 세율을 낮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가 부채가 심각한 영국 정부는 리즈 트러스 전 총리가 야심 차게 내놓은 대규모 감세안까지 철회시키고 고강도 긴축 재정과 세수(稅收)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 자영업자 감세를 해주기에는 난감한 상황인 것이다.
자영업자들은 “인력이 부족해 장사하기가 더 어렵다”고 했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로 다른 유럽 국가 직원들이 비자를 제대로 받지 못해 떠나며 인력난이 더 심해졌다. 앨런 소디 중소기업연합회(FSB) 미디어 책임자는 “정부가 진작 교육 정책을 대학 중심 교육에서 직업 중심 교육으로 개편해야 했다”며 “미용사 등 기술직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전문적으로 양성해 자영업 인력을 키워야 한다”고 했다.
수출 관련 규제도 완화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노팅힐에서 35년간 도자기 가게를 운영해 온 린디 위픈 씨는 “브렉시트 이후 유럽 국가에 도자기를 수출하기가 너무 어려워졌다”며 “고객사가 우리 제품을 수입할 때 관세를 얼마나 부담해야 하는지 불투명하다. 당국이 관세를 명확히 알려주고 서류 제출 절차를 간소화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 ‘이웃한 가게 메뉴 공동 판매’ 등 묘안 짜내
위기에 처한 자영업자들은 카페와 와인바처럼 이웃한 가게에서 서로 메뉴를 나눠 파는 등 갖은 판매 방안을 짜내고 있다. 영국 BBC방송에 따르면 런던시는 자영업을 지원하기 위해 중심지 브롬리 복스홀 울위치 등 3곳에서의 야간 영업 활성화에 각각 13만 파운드(약 2억 원)를 제공하기로 했다.
하지만 경기 침체가 길어지며 소비자들은 좀처럼 지갑을 열지 않고 있다. 영국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영국 소매판매는 전월 대비 0.4% 감소했다. 전년 동월 대비로는 5.9% 줄었다. 이는 전문가 전망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수년간 아르헨티나에서 살다가 1년 전 귀국했다는 노팅힐 주민 알렉산드라 뱅크스 씨는 “예전엔 마트에 품목이 다양했는데 물가가 높아선지 확 줄었다”며 “사람들도 대출 금리가 오르니 돈 쓰기를 주저하게 된다”고 말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설문조사 결과 경제학자들은 가계가 정부 정책 실패에 대한 막대한 비용을 치르면서 영국이 앞으로 G7 중 최악의 경기 침체와 가장 저조한 회복세를 나타낼 것으로 전망했다”고 보도했다.
런던=조은아 특파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