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는 선거’에 제도는 누더기
정치 실험? 제도 희화화 비판
여야 병립형·준연동형 거치며
소수정당 진입 유도 취지 퇴색
급기야 정의당 ‘2년 순환제’ 등장
비례로 눈도장 찍고,지역구로?
거대양당 비례 대거 총선 도전장
연고지 아닌 전략지역 노리기도
의석 늘리고 대표성 더 강화해야
지역구 선거에서 승자 독식에 따른 표심의 왜곡을 줄이고 다양한 직군과 소수자의 원내 진입을 유도해 국민의 대표성을 보완하는 ‘비례대표제’가 동네북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거대 양당은 다당제 가치보다 제3지대를 배제하는 ‘이기는 선거’를 위해 권역별 병립형 회귀에 무게를 두고 있다. ‘땅따먹기 배분’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정의당은 헌법이 정한 국회의원 임기 4년을 임의로 쪼개 2년씩 맡는 ‘비례대표 2년 순환제’를 헌정사상 처음 도입하기로 했다. 지난 총선에서 비례대표를 현행 47석에서 75석으로 늘려 비례대표제의 취지를 살리자던 정치권의 협의는 사라졌고, 비례대표 의원마저 향후 지역구 출마를 위한 도약대 정도로 여긴다는 비판도 나온다.
비례대표제는 1963년 제6대 총선에서 ‘전국선거구’(전국구)라는 이름으로 처음 도입됐다. 제1당에 실제 득표율과 무관하게 의석의 절반을 주는 식이었다. 지금처럼 별도로 정당별 득표율에 따라 비례대표를 선출하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병립형 비례대표제)는 2004년 제17대 총선 때 시작됐다.
2020년 21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이 ‘희화화 논란’을 자초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의 거센 반발에도 정의당 등 군소 정당 세 곳과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강행 처리했다. 지역구 경쟁력이 낮은 소수 정당의 원내 진입을 도와 다양성을 고취하자는 취지였지만, 비례대표를 75석으로 늘리자던 논의에 실패했고 ‘꼼수 위성정당’ 출현까지 겹치면서 혼돈을 초래했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여야 비례대표들이 대거 출마에 나서면서 정치권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민주당의 한 재선 의원은 29일 통화에서 “비례대표는 전문성 중심이어서 예전에는 ‘사고 지역’이나 자기 연고지 정도를 노렸는데 지금은 자기 당의 현역 의원 지역구에 도전장을 내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여성, 청년, 노인, 장애인 등 정치적 소수자나 노동, 안보, 과학기술 등 전문가가 배려받아 비례대표가 되는 것인데, 지역구 출마는 비례대표제 취지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민주당의 경우 비례의원 16명 중 4월 총선을 준비하는 의원은 강민정·정필모·신현영·김홍걸 의원을 제외한 12명이다. 유정주(경기 부천정), 김의겸(전북 군산), 양이원영(경기 광명을) 의원 등은 현역 의원 지역구에 도전장을 냈고 이들을 포함해 10명이 이른바 ‘양지’에 출사표를 냈다.
국민의힘 비례대표 의원 중에도 공천 접수 첫날인 이날 조수진 의원이 서울 양천갑, 이용 의원이 경기 하남 출마를 선언했다. 이영 전 비례대표 의원은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지낸 후 ‘지역구 쇼핑’ 논란 끝에 이날 서울 중·성동을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최근 순번 승계로 국회에 입성한 우신구·김은희 의원 외 아직 4월 총선 도전 여부를 밝히지 않은 비례대표 의원은 윤주경, 이종성, 박대수, 김예지, 지성호 의원 등 5명뿐이다.
전문성을 지닌 비례대표들이 지역구 의원과 매한가지로 당론에 따라서만 움직인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비례대표 명부는 결국 정당이 작성하기 때문에 비례대표들은 소위 ‘보은’해야 한다는 인식이 적지 않다고 한다. 민주당의 한 비례대표 의원은 “본인 소신도 중요하지만 당을 생각해야 하는 부분도 있어 전체와 개인 소신을 융화시키는 게 어려운 건 사실”이라며 “비례대표들이 더 다양하게 현장과 소통하면서 대안을 제시하는 부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여기에 정의당은 전날 전국위원회에서 ‘비례대표 2년 순환제 도입’을 결정하고 이번 총선에서 당선된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임기 시작 2년 뒤에는 의원직을 사직하고 후순위 의원에게 남은 2년 임기를 승계토록 했다. 정의당은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나온 오래된 정치개혁 실험”이라고 설명했지만, 배윤주 국민의힘 상근부대변인은 이날 논평에서 “국민의 눈에는 ‘의원직 나눠먹기’ 꼼수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도 “제도를 희화화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고 했다.
조진만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비례대표 전문가가 47명이 있다고 하지만 지방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있나. 대표성을 갖는 영역을 더 늘려야 하고 결과적으로 선거제 개편을 통해 비례 의석수를 늘리는 데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주장했다.
차재권 부경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비례대표도 유권자가 선택할 수 있도록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면서 “개방형 명부제를 도입해야 하고 전문가들도 지역적으로 산재해 있어 지역 배분도 반영할 수 있으면 한다”고 제언했다. 민주당의 한 비례대표 의원은 “비례대표가 몇 석인지도 중요하지만 전문성 있는 목소리를 냈을 때 그것이 잘 반영되는 당의 시스템을 정립해야 한다”고 했다.
이범수·손지은·김주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