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주유소에서, 기름값 숫자 옆에 심심치않게 눈에 띄는 스티커다. 사진 속 주인공은 바이든 미국 대통령.
득의양양한 표정의 바이든 대통령이 가리키는 곳에 기름값 숫자가 위치하도록 붙인다. 물론, 바이든이 ‘물가? 내가 올렸어!’라고 자랑할 리 없다. 바이든에 반대하고 트럼프와 공화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유권자들 열받으라고 붙이는 것이다. 자매품도 있다. “그거 내가 한거야!” 밑에 “내가 도왔어!”라고 말하는 카말라 해리스 부통령 사진을 붙이는 스티커다.
넓디넓은 땅덩이 때문에 대중교통망이 약한 미국에서, 주유소는 유권자들이 인플레이션을 가장 강하게 느끼는 현장이다. 그렇지않아도 인기가 바닥인 바이든 대통령이 기름값을 잡지 못하면 민주당은 올해 11월 중간선거 참패는 물론이고 정권재창출 가능성도 더욱 낮아질 위기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번주 중동 순방 중이다. 하이라이트는 사우디 아라비아 방문으로, 올해 나이 79세인 그가 만날 가장 중요한 상대는 ‘MBS’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36살의 권력자, 무함마드 빈 살만(Mohammed Bin Salman) 왕세자다. 그의 아버지 살만 국왕이 군림하고 있지만 86세로 연로하여, 국제관계와 국방정책, 사회 문제는 물론 가장 중요한 석유까지, 모든 분야의 권한을 아들인 MBS가 실질적으로 행사한다. 그래서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그를 만나 반갑게 포옹하고 “그래요, 우리가 석유 생산을 확 늘려 유가를 떨어뜨려 드리지요!” 하는 약속을 받아낼 수 있으면 바이든은 얼마나 좋을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 경제에도 좋다.)
문제는 바이든과 빈 살만이 매우 껄끄러운 관계라는 사실이다. 바이든은 그동안 사우디의 자기 상대(카운터파트)는 국왕이지 그 아들이 아니라며 빈 살만을 무시했다. 그러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가가 치솟자 바이든은 지난 3월 원유 증산을 요청하려고 빈 살만에게 전화를 하려 했다. 빈 살만은 통화를 거절했다. 이번 만남의 성사를 위해 미국은 상당한 외교력을 기울이고, 무기수출 재개 등 ‘당근’을 들이밀어야 했다. 석유산업적 현실도 녹록치가 않다.
원유 ‘수출’ 최강자, 사우디 아라비아
세계석유시장에서 사우디 아라비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정도일까?
사우디 아라비아는 미국, 러시아와 함께 1일 산유량 세계 3강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자국내 수요가 많은 두 나라와 달리, 사우디는 원유 수출시장에서 막강한 파워를 발휘한다. 전세계 원유수출 금액 중 국가별 비중을 보면 사우디는 16.5%로, 러시아의 2배에 이른다. 게다가 사우디 아라비아의 원유는 채굴 비용도 적게 드는 편이어서 가격경쟁력도 높다.
최근 공격적 금리인상에 뒤따를 경기침체에 대한 우려로 조금 꺾였다고는 하지만, 국제유가는 여전히 매우 높은 수준이고, 미국 뿐 아니라 각국이 이로 인해 신음하고 있다. 2020년 상반기에 배럴당 20달러선까지 떨어졌던 국제유가는 최근 90~100달러 선의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당시는 코로나 확산으로 인한 수요 급감, 석유시장 주도권을 잡고 미국 셰일 업계를 말려죽이기 위한 러시아와 사우디의 증산 등 여러 요인이 겹쳤다.)
이런 상황에, 세계최대 에너지 소비국 가운데 하나인 미국이 사우디에 원유 증산을 요청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그런데, 과연 지금의 사우디는 어느 정도의 증산 여력이 있는 것일까? 사우디의 증산 여력은 국제유가를 확 끌어내리기에 충분한 양일까?
마크롱이 바이든에게 전한 안좋은 소식
지난 6월말 독일 바바리아의 알프스 휴양지 엘마우 성에서 G7 정상회의가 열렸다. G7 각국 대통령과 수상, 총리들은 넥타이도 풀고 편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이 미국 바이든 대통령에게 뭐라고 속삭였고, 바이든 대통령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마크롱이 귀엣말로 전한 내용은 바로 이것이었다.
마크롱이 G7 참석 전 아랍에미리트의 모하메드 빈 자예드 대통령에게서 들었는데, ‘사우디 아라비아는 하루 15만 배럴 정도밖에 추가 공급을 할 수 없으며, 앞으로 6개월 정도는 이런 사정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사우디가 최대로 생산할 수 있는 원유 물량은 장부상으로 하루 1천2백만 배럴이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생산하고 있는 건 하루 1천50만 배럴 가량이다. 1백50만 배럴이 비는데, 로이터가 전한 사우디 석유산업 고위관계자 발언에 따르면, 사우디가 실제로 늘릴 수 있는 추가생산량은 하루 최대 1백만 배럴 정도다. 그러나 이것도 예비설비 등을 포함한 숫자이고, 당장 시장에 추가공급할 수 있는 건 15만 배럴에 불과하다는 게 석유수출국기구(OPEC) 투톱인 아랍에미리트(UAE) 대통령의 전언인 것이다.
반면,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제재로 국제시장에 부족해진 원유 물량은 하루 260만 배럴에 이른다. 아랍에미리트의 에너지 장관 수하일 미즈루아이가 6월 요르단 컨퍼런스에서 밝힌 숫자다.
사우디의 즉각적인 대량 증산이 어렵다는 건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조사자료에도 나온다. OPEC보고서를 인용한 로이터의 6월28일자 보도에 따르면, OPEC회원국에서 ‘생산준비를 마친 신규 유정(completed wells)’의 개수는 2021년 1,588개로, 2020년보다 280개가 줄었고, 2017년 이래 가장 낮은 수준이다. 사우디의 생산준비완료 신규유정은 2021년 314개로, 전년대비 152개 줄었다. OPEC회원국 전체 생산준비완료 신규유정 감소분의 절반 이상이 사우디에서 줄어든 셈이다.
증산 위한 투자 못 늘렸던 산유국들… 이유는?
석유매장지에 구멍을 뚫어 석유를 뽑아올리면 어느정도 지난 뒤 점차 산출량이 줄어든다. 이 때에 대비해 원유생산업체는 새로운 구멍을 뚫고, 순조롭게 원유를 뽑아낼 수 있는 압력을 테스트하고, 뽑아낸 기름을 수송하는데 필요한 설비를 갖춰놓아야 한다. 이러한 생산예비능력이 지난해에 이미 많이 줄었다는 건, 올해 하반기에 당장 원유생산이 급증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건 주요산유국들의 돈벌이가 2014년 이후 예전같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2014년 이후 미국은 셰일가스와 셰일오일의 생산을 늘려 유가를 끌어내리고 중동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며, 크림반도를 강제병합한 러시아의 경제에 타격을 주고자 했다. 반면 러시아는 어떻게든 원유 수출을 늘려 외화를 벌어야 했다. 사우디는 귀찮은 경쟁자들을 치킨게임으로 제압해 원유시장 주도권을 지키려고 생산을 늘렸다. 국제유가는 2016년 20달러 대까지 떨어졌다. 이후 사우디와 러시아가 ‘우리 이러지 말고 적당히 나눠먹읍시다’ 로 해석되는 감산 합의를 통해 유가를 끌어올렸지만, 2020년 코로나19 창궐로 유가는 다시 20달러대까지 내려앉았다.
게다가 신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시대적 추세도 거세어졌다. 사우디마저도 신재생에너지와 원자력에 투자하는 판국이다. 산유국들은 이제, 당장 필요하지 않은 유정에까지 큰 돈을 투자하지 않거나, 그럴 돈이 없다(베네수엘라 등의 경우). 미국의 셰일업계는 민주당 정권의 환경규제와 높은 생산비용때문에 섣불리 생산설비를 늘리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우디로부터 화끈한 협조를 얻어내야 하는 것이 바이든의 처지다. ‘봐라! 내가 중동에 가서 석유공급을 확 늘리겠다는 사우디의 약속을 받아왔다. 이제 여러분이 주유소에서 느끼는 고통도 곧 해결될 것이다’ 하고 외치고 다녀도 중간선거를 건질 수 있을까 말까 한 상황이다.
그게 되려면 바이든과 빈 살만 왕세자 사이에 강력한 호감이 형성되어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정 반대다.
빈 살만이 살인마?…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카슈끄지 살해사건
2018년 10월2일, 미국 워싱턴포스트에 칼럼을 쓰는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카슈끄지는 터키(튀르키예)에 있었다. 결혼식을 위한 서류를 발급받으려고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영사관을 찾아갔다가 영사관 내에서 살해당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살해범은 사우디 본국 정부에서 급히 비행기를 타고 온 요원들이었고, 빈 살만 왕세자와 관련있는 인물들이었으며, 이들 가운데 포함된 법의학 전문가가 카슈끄지의 시체를 분해해 어디론가 빼돌렸다. 낮에 들어간 카슈끄지가 나오지 않으니 약혼녀는 밤늦도록 영사관 앞에서 기다리다 결국 터키 당국에 실종신고를 냈다.
터키 당국의 수사로 사우디 영사관 주변 CC-tv 영상이 하나둘 공개되면서 사건의 정황이 드러났다. 미국 정보당국은 사우디의 실권자인 빈 살만 왕세자가 이 끔찍한 작전의 배후에 있다고 지목했다. 그렇잖아도 빈 살만 왕세자는 많은 왕가 인사들을 체포,구금, 고문하거나 재산을 몰수하는 등, 절대왕정국가인 사우디에서도 유례가 없는 폭압적 권력독점을 실시해 국제적인 비난을 받던 차였다. 빈 살만에 대한 서방세계의 비난은 실로 맹렬해졌다. 그 다음달 열린 G20회의에서 빈 살만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는 정상은 러시아의 푸틴 뿐이었다. (이후 트럼프 당시 미국대통령도 빈 살만이 카슈끄지 죽이라고 했다는 증거는 없지않냐며 그를 두둔했다.)
반면 바이든은 이듬해인 2019년 트럼프에 맞서 대선후보로 선거전을 치르면서, 빈 살만과 사우디 왕가에게 카슈끄지 살해의 책임을 묻고 국제사회에서 왕따시키겠다고 공언했다. 사우디가 인접국 예멘의 내전에 개입해 친 이란 세력을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비인도적 민간인 살상을 자행한다는 것도 바이든이 빈 살만을 상종하지 않으려는 이유였다.
바이든은 인권을 중요한 가치로 표방하는 미국 민주당의 대선후보로서, 무고한 인명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폭압적 독재자와는 상종할 수 없다고 공언했다. 대통령이 된 후로도 그런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올들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유가가 치솟기 전까지는.
사우디와 미국…누가 ‘을’인가
사우디는 아랍 세계에서 대표적인 미국의 동맹국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1938년 첫 석유 발견 이후 줄곧 미국과 공동운명체였다. 석유수출 대금으로 미국 달러만 받는 ‘페트로달러’ 시스템 확립으로 달러 헤게모니를 도왔다. 이란을 통제하고 소련(이후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데에 핵심적인 기여를 해 왔다. 후세인의 이라크나 이슬람 근본주의 IS 등 국제질서를 위협하는 세력을 제압하는 데에 필수적인 군사기지를 제공해 왔다. 그런 목적을 위해 이스라엘과의 관계 개선에도 나섰다.
빈 살만 왕세자는 정치권력과 관련해서는 무자비한 독재자이면서도,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이슬람 근본주의 색깔을 빼고 종교경찰을 약화시키며 서방과의 문화교류를 확대했다. 힙합가수들의 공연이나 BTS의 콘서트도 허용했다. 여성들의 운전 등 사회,경제활동을 보다 넓게 허용하는 개혁을 실시했다.
이런 동맹국 지도자에게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들이대며 공개망신을 주는 건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장관 등 외교안보 분야의 전문가들은 지적해 왔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수호하는 게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해야 할 말이 있으면 동맹국의 지도자가 당혹스럽지 않게, 닫힌 문 뒤에서 조용히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의회에서 수십년간, 또 오바마의 부통령으로서 외교관련 경험을 누구보다 많이 쌓았다고 자부하는 바이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이 했던 말을 주워담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미국에선 민주당 정치인들에 대해 ‘듣기 좋은 말은 많이 하는데 실제로 해 내는 일이 별로 없다’는 비판이 가해지는 경우가 있는데, 바이든도 이런 비난을 많이 받는다.
빈 살만의 배짱 “신경 안 쓴다. 맘대로 해 보라”
이에 비하면 빈 살만은 보다 일관되고 의연하게 상황을 견뎌왔다고 할 수 있다. 석유와 사우디의 지정학적 위치, 이 두가지를 쥐고 있는 한, 미국은 자신을 적으로 돌릴 수 없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러시아와 중국의 구애가 계속되는 것도 그의 입지를 뒷받침해 주었다.
그는 미국 시사월간지 디 애틀랜틱 4월호에 실린 심층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이든이 나에 대해 뭐라 생각하든)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미국의 국익을 생각하는 게 그의 일 아닌가. 맘대로 해 보라고 하지.” “우리는 미국과 길고도 역사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우리 목표는 그 관계를 지키고 강화하는 것이다.” “사우디가 제공하는 기회를 (미국이) 놓친다면, 동쪽에 있는 다른 사람들(중국)이 매우 좋아할 것이다.”
올해 36세인 사우디의 왕세자는 86세인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할 것이고, 지금보다 더욱 막강한 권력을 쥐고 아라비아 반도를 통치할 것이다. 석유는 언젠가 고갈될 에너지이므로 생산을 늘려 가격을 떨어뜨리는건 장기적으로 사우디에 손해이며, 사우디도 점차 탈석유 경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게 그의 비전이다.
반면 바이든에겐 시간이 별로 없다. 올해 11월 중간선거에 참패하고 나면 조기 레임덕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바이든은 이번 사우디 방문에 예멘 내전과 무기 수출 문제, 이스라엘 문제 등 다른 의제들도 잔뜩 얹었다. 물론 이들 의제들도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하지만 그의 지지율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주유소에 ‘기름값 인상? 내가 한거야!’ 스티커를 붙이는 공화당 지지자들 뿐 아니라 민주당 내부에서도 비판이 나온다. ‘살인자 빈 살만에게 면죄부만 줘서 미국의 원칙과 가치를 훼손하고, 얻어오는 실리는 별로 없을 것’이라는 진보세력의 비판이다. 그래서도 더더욱 바이든 입장에선 화끈한 원유 증산이라는 선물을 받아 와서 유가를 끌어내려야 할 필요가 있다.
국제유가가 머지않아 잡힐 가능성이 있긴 한데, 문제는 그게 바이든이 얻어내는 사우디 증산 약속 때문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인플레 관리 실패에 따른 글로벌 경기침체 우려 때문에 유가가 꺾일 가능성이 높다.
(구성: 이현식 D콘텐츠제작위원 / 콘텐츠디자인: 옥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