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유럽인권재판소(European Court of Human Rights)가 흥미로운 판결(BTS Holding v. Slovakia)을 내렸다. 중재판정(arbitral award)의 집행청구를 기각한 국내법원의 판결이 국제법에 위배되는지에 관한 결정이 그것이다.
1. 유럽인권재판소, 슬로바키아 법원 판결을 ‘자의적 판결’이라며 배척
지난 2006년 비티에스 홀딩(BTS Holding)은 슬로바키아의 국유재산기금(National Property Fund)으로부터 브라티슬라바 공항(Bratislava Airport)의 과반지분을 취득하기 위한 주식매매계약(SPA)을 체결하고, 1차 매수대금을 지급한다. 그러나 계약상 합의된 기간 내에 경쟁당국으로부터 주식취득 승인을 얻지 못하자 기금은 계약을 해제하기로 결정한다. 해제통보 시 기 수령했던 매수대금을 BTS Holding에 반환하였음은 물론이다. 이어 2008년, BTS Holding과 기금은 주식매매계약 해제에 관한 합의계약(Settlement Agreement)을 체결하는데, 2006년 9월 21일부로 계약해제가 유효하게 성립했다는 점과 양 당사자들 간에 추가적인 손해배상 의무가 존재하지 않다는 점 등이 합의되었다. 2009년 기금은 계약해제 시점부터 1차 매수대금의 반환 시점 사이에 발생한 이자를 산정하여 BTS Holding에 지급한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기금이 BTS Holding에 반환한, 1차 매수대금에 상당하는 금전이 원금 변제에 먼저 충당되는지 아니면 이자 변제에 먼저 충당되는지에 관해 이견이 발생한 것이다.
기금 측 계산에 따르면 1차 매수대금 반환에 이은 이자 지불로 인해 더 이상은 변제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고 BTS Holding측 계산에 따르면 아직 받을 돈이 남은 상황이었다. 이에 BTS Holding은 2010년 기금을 상대로 ICC(International Chamber of Commerce, 국제상업회의소) 중재를 제기하여 승소한다. 2012년 6월 8일에 내려진 판정에서 중재판정부는 변제금은 이자에 먼저 충당된 이후 원금에 충당된다고 판정하였다. 중재판정부는 기금에 189만 4597 유로를 추가 변제하고 변제가 완료될 때까지 연 14.25%의 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하였다. 2013년, BTS Holding은 슬로바키아 법원에 ICC 중재판정의 집행을 구하는 소를 제기했으나 1심, 2심에서 연거푸 기각되었다. 법원은 주식매매계약에는 중재합의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후속 합의계약에는 중재합의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바 합의계약이 주식매매계약을 대체하는 이 사건에서는 양 당사자들 간 중재합의가 부재하다고 판단하였고, 또한 중재판정을 집행하는 것은 슬로바키아의 공공정책에 반한다고도 판단했다. BTS Holding은 2015년에 슬로바키아 헌법재판소에 법원 판결로 인해 자사의 재산권 및 방어권이 침해되었다고 제소하였으나 각하된다. 여기까지가 사건의 배경이다.
2017년 BTS Holding은 중재판정의 집행을 거부한 슬로바키아 법원 결정이 유럽인권협약(European Convention of Human Rights)에 위배된다며 유럽인권재판소에 제소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지난 6월 30일에 나왔다. 결론적으로 유럽인권재판소는 슬로바키아 법원의 판결이 유럽인권협약에 위배된다고 판결하였다. 유럽인권재판소는 상사중재에서 내려진 ‘판정(award)’이 유럽인권협약상 보호대상이 되는 ‘소유물(possession)’에 해당한다고 보아, ‘자의적 판결’로 소유권을 침해한 슬로바키아 법원 판결이 위법하다고 판결하였다. 중재합의가 포함되지 않은 합의계약이 주식매매계약의 ‘분쟁해결조항’마저 대체하고, ICC 중재판정의 집행이 슬로바키아 공공정책에 반한다고 본 국내법원 판결이 ‘자의적’이라는 판단이 선행되었음은 물론이다. 거기에 설사 슬로바키아 법원의 (공공정책 위배) 판단이 적절하였다고 가정하여도 중재판정의 집행거부는 비례성의 원칙에 위배되어 여전히 자의적인 판결에 해당한다는 취지의 설시까지 덧붙였다.
2. 국제재판을 통한 국내판결 재심, 우리도 자유롭지 않다
국제공법에 의해 준거되는 국제재판에서 국제법의 규율대상이 되는 것은 국가의 행위(state act)이다. 그리고 국가의 행위에는 행정부의 처분이나 입법부의 입법, 사법부의 판결이 모두 포함되는바, 국제재판에서 국내법은 법이 아닌 사실관계로 치부된다. 다만 사법부가 국내법의 해석에 관해 내린 판단은 사실관계를 확정 짓는 차원에서 그대로 존중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국내법원의 국내법적 판단을 사실상 ‘법적 관점’에서 재심사하는 국제재판도 간혹 생기기 마련인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중재판정의 취소 또는 집행거부와 관련된 국내법원 판결이 문제 시 되는 경우이다. 일반적으로 중재판정의 효력은 국내법인 각국의 중재법(주로 UNCITRAL 모델중재법에 기초한)과 국제조약인 ‘외국중재판정의 승인 및 집행에 관한 유엔협약(The United Nations Convention on the Recognition and Enforcement of Foreign Arbitral Awards, 뉴욕협약)’ 에 의해 보장된다. 비록 양자는 상호 보완적으로 해석되고 적용되는 것이 원칙이겠으나, 양자 간에 접점이 존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중재판정의 효력에 관한 국내법원 판결 중 뉴욕협약의 적용대상이 되는 부분이 국내법의 해석으로서 그대로 존중되지 않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이 경우 국내법원의 국내법적 판단에 대해서도 사실상 재심사가 이뤄지게 된다.
앞서 소개한 유럽인권재판소 판결은 유럽 국가들만 체결한 유럽인권협약에 근거한 것이므로 우리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중재판정을 일방적으로 취소한 국내법원 판결이 국제재판에 회부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시사점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현재 100여 개 이상의 투자보호협정의 체약국인데, 대다수의 투자보호협정은 중재판정과 같은 ‘금전적 청구권(claim to money)’을 협정상 보호대상에 해당하는 ‘투자’로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국내법원의 판결이 국제재판에서 재심사될 경우 많은 논란이 야기되기 마련이다. 국제재판의 결과가 항상 옳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국가주권에 대한 부당한 침해 논란도 발생할 수 있다. 다만 국내 법원의 판결이 국제재판에서 재심사 될 수 있다는 현실에 대해서는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마침 장장 10여 년을 끌어온 론스타 ISDS의 절차가 지난 6월 29일 종료되었다. 얼마 후 론스타 ISDS 사건의 판정이 내려지면 결과와 무관하게 우리나라의 국제분쟁 대응역량 강화 필요성이 조명될 것이다.
3. ISDS 판정부의 국내판결 재심 사례
중재판정의 효력에 관한 국내법원 판결이 심사대상이 된 대표적인 투자자-국가분쟁(ISDS, investor-state dispute settlement) 사건은 지난 2010년에 판정이 내려진, 튀르키예(터키) 국적의 에이티에이 컨스트럭션(ATA Construction)과 요르단 간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 International Centre for Settlement of Investment Disputes) 투자중재사건이다. 이 사건에서는 ATA Construction과 요르단 공기업인 에이피씨(APC) 간에 발생한 상사중재에서 패소한 APC가 요르단 법원에 동 중재판정의 취소를 구하였고, 요르단 법원은 중재판정을 취소하였다. 또한 중재판정이 취소될 경우 그 근거가 되는 중재합의까지도 무효가 된다고 정한 요르단 중재법 제51조에 따라 ATA Construction과 APC 간의 ‘중재합의’ 자체를 무효화하여 추가적인 중재 제기가능성을 원천 차단하였다. 그 결과 ATA Construction은 해당 투자와 관련된 일련의 분쟁을 요르단 공기업을 상대로, 요르단 법원에서의 소송을 통해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에 ATA Construction은 요르단 법원에서 진행되는 소송에 대응하는 한편, ICSID 협약(Convention on the Settlement of Investment Disputes between States and Nationals of other States)에 따른 ISDS를 제기하여 ‘중재합의’의 복원과 요르단 법원에서 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국내소송의 절차중단을 청구하였다.
ICSID 판정부는 당사자들 간의 중재합의를 무효화한 요르단의 행위는 뉴욕협약 제2조를 위반한 것으로 이는 곧 투자보호협정에 따라 보장되는 투자에 대한 보호의무(fair and equitable treatment)에 위배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ICSID 판정부는 요르단 중재법 제51조에 따른 중재합의 무효화가 요르단 법원의 중재판정 취소로 인해 야기되었다는 점과, 문제의 제51조는 투자계약이 체결된 1998년 이후인 2001년도에 발효되었으므로 1998년에 체결된 중재합의에는 적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법원이 이를 소급 적용하였다고 지적하며, 국제법상 위법행위를 구성한 것은 요르단 중재법 제51조가 아닌 요르단 법원의 구체적인 판결이라고 설명하였다. 결국 ICSID 판정부는 청구인의 요청을 승인하여 요르단 법원의 판결을 취소, ATA Construction과 APC 간의 중재합의를 복원하였고 당시 요르단 법원에서 진행 중이던 모든 현지 법원 소송들을 ‘즉시 그리고 무조건(immediately and unconditionally)’ 종료(terminate)하라고 명령하였다. 요르단 사법부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굴욕이었을 것이다.
4. 우리 사법부도 국제분쟁 동향에 관심 기울여야
ISDS는 국제공법에 의해 규율되는 국제재판이긴 하지만 세계무역기구(WTO) 분쟁과 같이 국가 간 분쟁(state-to-state dispute)은 아니기에, 외국인 투자자에게 당초 법으로서 적용되었던 국내법이 심리과정 중 사실관계 쟁점이 아닌 법적 쟁점으로 대두되는 경우가 있다. 특히 투자분쟁에 관한 대표적인 다자조약인 ICSID 협약은 당사자들 간에 합의된 준거법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국제법뿐 아니라 당사국의 국내법도 적용하도록 규정하고 있고(제42조), 투자보호협정들 가운데는 투자유치국의 법률도 ISDS의 준거법으로 적용(예컨대 한-스페인 BIT 제9조 등)토록 규정한 조약들이 다수 존재한다. 이러한 경우 국내법원의 국내법적 판단이 국제재판의 심사대상이 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국내법원의 판결이 국제재판에서 재심사될 경우 많은 논란이 야기되기 마련이다. 국제재판의 결과가 항상 옳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국가주권에 대한 부당한 침해 논란도 발생할 수 있다. 다만 국내법원의 판결이 국제재판에서 재심사 될 수 있다는 현실에 대해서는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마침 장장 10여 년을 끌어온 론스타 ISDS의 절차가 지난 6월 29일 종료되었다. 얼마 후 론스타 ISDS 사건의 판정이 내려지면 결과와 무관하게 우리나라의 국제분쟁 대응역량 강화 필요성이 조명될 것이다. 차제에 우리 사법부에서도 국제분쟁에 관심을 갖고 연구발전의 노력을 기울이면 국가 전체의 국제분쟁 대응역량 강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정하늘 대표(국제법질서연구소·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