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째 ‘뜨거운 감자’ 상속세
“9900억 과해” LG일가 소송 패소
삼성가 세모녀, 해마다 지분 매각
한미약품, 재원 마련 놓고 가족 분쟁
해외 자본에 경영권 상실 우려도
상속세율 최고 60%… OECD ‘최고’
재계 “부작용 속출… 상속세 개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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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광모 회장 등 LG그룹 총수 일가가 상속세 일부를 감액해달라며 과세당국을 상대로 낸 1심 소송에서 4일 패소했다. 지난달엔 한미약품그룹이 막대한 상속세 재원 마련을 위해 OCI그룹과의 통합을 추진하며 가족 간 경영권 분쟁을 벌이기도 했다. 징벌적 수준으로 높은 한국의 상속세율이 기업 경영권을 위협하고 있는 셈이다. 24년째 그대로인 상속세를 손질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지만 ‘부자 감세’ 논란으로 개편이 쉽지 않다.
서울행정법원 행정5부(부장 김순열)는 이날 구 회장이 모친 김영식 여사, 두 여동생 구연경 LG복지재단 대표, 구연수 씨와 함께 용산세무서장을 상대로 제기한 상속세 부과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구 회장 측은 2018년 구본무 전 회장 사망으로 상속받은 LG CNS 지분 1.12%에 대한 가치를 세무당국이 과대평가했다는 취지로 2022년 9월 소송을 냈다.
비상장사인 LG CNS에 대해 세무당국은 비상장 거래 플랫폼에서의 시세를 기준으로 지분 가치를 평가한 반면 구 회장 총수 일가는 LG CNS의 거래량이 많지 않다는 이유 등으로 비상장 주식 시세로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과다하고 주장했다. 구 회장 측이 처분 취소를 요구한 금액은 약 10억원이다. LG 오너 일가에 부과된 전체 상속세는 약 9900억원인데 이중 7200억원은 대출 등을 활용해 완납한 것으로 알려졌다.
LG 오너 일가가 상속세 문제로 소송까지 제기한 것은 과도한 상속세율로 인한 기업들의 속앓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통상 재계 총수의 사망 뒤 지분을 상속받아 경영권을 이어가기 위해선 천문학적 세금을 정부에 내야한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 38개중 상속세를 물리는 나라는 24개국이다. 이중 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이 50%로 일본(55%)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하지만 최대주주가 기업을 승계받을 때는 상속세율의 할증으로 최고세율이 60%로 높아진다. OECD 평균인 15%의 무려 네 배다. 주요 7개국 상속세율은 프랑스 45%, 미국 40%, 영국 40%, 독일 30% 수준이다.
재계 서열 부동의 1위 삼성 일가에도 상속세율은 부담이다.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물산 사장은 고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으로부터 물려 받은 유산에 부과된 12조원 규모의 상속세를 내기 위해 2021년부터 해마다 삼성 주력 계열사 지분을 매각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2021년 받은 개인 신용대출과 해마다 3600억원에 달하는 배당금으로 상속세를 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상속세 재원 마련 문제는 경영권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제약 분야 연구개발(R&D)로 선두권에 올라섰던 한미그룹이 에너지 화학 기업인 OCI그룹과의 이종 사업간 통합을 추진한 배경도 5400억원 규모의 상속세에 있었다. 고 임성기 창업주의 부인 송영숙 한미그룹 회장과 장녀 임주현 부회장 측은 OCI에 지분 매각으로 약 2775억원을 확보해 상속세로 낼 계획이었다. 장·차남인 임종윤·종훈 사내이사 측은 OCI에 경영권을 빼앗길 수 있다며 반대했는데 결국 주주총회 표대결에서 형제 측이 이사회에 입성하며 통합은 무산됐다. 상속세로 인해 가족 간 분쟁이 불거진 셈이다.
막대한 상속세가 경영권 약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 고 김정주 넥슨 창업주 일가는 넥슨의 지주회사인 NXC 지분 29.3%를 상속세로 내기 위해 기획재정부에 물납했는데 이 지분에 대한 입찰이 두 차례나 실패했다. 물납은 일정 요건을 충족할 경우 금전 외 부동산이나 주식으로 상속세를 내는 방식이다. 매각 예정금액이 4조 7000억원에 달하는데다 지분을 인수하더라도 경영권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기존 지분이 있는 중국 기업이나 중동 국부펀드 등이 매수에 참여할 경우 경영권을 해외 자본에 넘길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로 콘돔업체 유니더스, 밀폐용기 업체 락앤락 등이 상속세를 내기 위해 경영권을 넘겼다.
재계에서는 상속세제 개편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지난달 정부와 국회에 2024년 조세제도 개선과제 152건을 담은 건의서를 제출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지난달 ‘51회 상공의 날’ 기념식에서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들이 1세대를 지나 2세대, 3세대로 넘어가는데 상속세를 신경 쓰느라 혁신은 커녕 기업 벨류업이나 근로자 처우 개선에 나설 엄두도 못 내고 있다”며 제도 개선을 약속했다. 이수원 대한상공회의소 기업정책팀장은 “회사 지분으로 물납을 시도하고 해외 사모펀드에 손을 내미는 등 부작용이 이미 나타나고 있다”라면서 “하루빨리 상속세 개편에 착수해야 한다는 게 재계의 공통된 요청”이라고 말했다.
박은서·박성국 기자
2024-04-05 2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