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 대화 물꼬 트일지 주목
증원 규모도 대화 테이블로?
정부, 증원안 조정 가능성 첫 언급
대화 의지에 전향적 메시지 낸 듯
의협·교수·전공의 의견 다 달라
전의교협만 “의견 모을 수 있어”
의료계 대부분은 “무리한 요구”
의정관계 더 얼어붙을 수도
尹, 전공의 처분 확고한 입장 유지
전의비 “사태 해결 의지 안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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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 갈등 끝은 어디에…
의과대학 교수와 개원의가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에 반발하며 진료 축소를 본격화한 1일 서울의 한 대학병원 의료진이 교수연구동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의 1일 대국민 담화가 꽉 막힌 의정(醫政)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을지 주목된다. 윤 대통령이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논의 테이블에 올릴 여지를 둔 것은 사실상 처음이다. ‘의료계가 확실한 과학적 근거가 있는 통일된 안을 정부에 제안한다면’이라고 전제를 달았지만 가능성을 열어 뒀다는 점에서 이전보다 전향적 메시지로 읽힌다. 그동안 정부는 “(의정 대화에서) 모든 의제를 논의할 수 있지만, 2000명 증원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확고하다”고 거듭 밝혀 왔다. ‘증원 규모 논의’보다는 ‘2000명 증원 확고’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공’을 넘겨받은 의료계 반응은 현재로선 뜨뜻미지근하다. 특히 대한의사협회(의협) 등 의대 증원 저지 투쟁을 벌이고 있는 의료계 핵심 단체들의 반응이 부정적이다. 김성근 의협 비상대책위원회 홍보위원장은 브리핑에서 “입장이 없다가 공식 입장”이라며 “논평할 내용이 있어야 논평을 하는데 그럴 수가 없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다만 “(대국민 담화가) 일고의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라며 여운을 남겼다. 그는 “(대통령이) 필수의료 정책 4대 패키지를 쭉 설명했는데 큰 어젠다는 의협과 오래 논의하며 합의한 내용도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계획이 없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던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방재승 전국의대교수비상대책위원회(전의비) 위원장은 “정부는 현 사태를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담화문이었다”며 “한국 의료의 미래가 걱정이다. 전공의들이 돌아올 길이 오늘 담화문 때문에 완전히 막힌 듯하다”고 혹평했다. 윤 대통령이 담화에서 “국민 생명을 인질로 잡고 불법 집단행동을 벌인다면 국가는 법과 원칙에 따라 대응할 수밖에 없다”며 복귀하지 않고 버티는 전공의들에 대한 면허정지 처분을 거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에둘러 밝힌 것을 염두에 둔 우려다. 전공의 중에선 가톨릭중앙의료원에서 일했던 류옥하다씨가 “입장 없음”이라고 짧은 입장문을 남겼다.
반면 전국 40개 의대가 모인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는 의료계가 통일된 안을 낼 수도 있다며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조윤정 전의교협 비대위 홍보위원장은 “김택우 의협 비상대책위원장, 김창수 전의교협 회장,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비상대책위원장이 7주째 얘기해 왔기 때문에 의료계에서 통일된 안을 내는 것은 가능하다. 현실성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전날 전의교협 김 회장이 의협 비대위에 정책분과위원장으로 합류하면서 의견 모으기가 더 수월해졌다는 것이다.
다만 의료계의 반응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통일된 안을 가져오라’는 것 자체가 무리한 요구라는 지적도 나온다. 의협은 오히려 “500~1000명을 줄여야 한다”며 정부의 증원 계획과 정반대 방향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전의교협과 전의비는 “2000명은 과하다. 규모를 줄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의대 학장 단체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는 350명 증원이 현실적이라고 주장한다. 전공의 단체인 대전협은 의대 증원 전면 백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의정 대화 필요성을 거듭 강조해 온 조승연 인천의료원장은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대국민 담화는 예전처럼 의료계에 공을 던져 놓고 ‘한번 얘기해 봐’라는 정도로, 결국 정부 증원안 그대로 추진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전의교협이나 전의비 등 교수 단체만 조정안을 들고 대화 테이블에 앉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정부가 의협까지 설득해 통일된 안을 가져오라고 할 수도 없고, 무엇보다 의대 교수들만 대화 테이블에 앉는 것을 의협이 두고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재훈 가천대 길병원 교수는 “여지가 열려 있다지만 결국 정원에 있어선 변화가 없다라고 명백하게 표현했기 때문에 상황 변화는 없을 것 같다”고 내다봤다.
정형선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도 “의협, 의대교수, 전공의들 생각이 달라 통일된 안을 만들어 정부에 주는 건 불가능하다”며 “각자 합리적인 근거와 안을 갖춰 정부에 전달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서울대의대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던 정진행 분당서울대병원 교수는 소셜미디어(SNS)에 “다양한 의견을 받아서 모두가 조금씩 양보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으라고 국민의 대표인 대통령으로 뽑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길 바란다”고 했다.
지금이야말로 전공의 단체를 비롯한 의료계도 단일 창구를 만들고 대안을 제시해야 할 시점이란 내부 목소리도 나온다. ‘의료재앙’이 현실화하기까지 남은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권용진 서울대병원 공공진료센터 교수는 “전공의들이 묵묵부답하는 것도 문제다. 이런 형태로는 민주주의적 절차를 지켜 갈 수 없다”며 “대화 전제조건을 걸어 놓고 사라져 버리면 대화가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어찌 됐든 지금이라도 의료계는 의견을 모아 증원안을 제시하는 게 옳다”고 강조했다.
이현정·한지은·유승혁 기자
2024-04-02 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