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공연장 총격 240명 사상
IS “우리 소행” 푸틴 “우크라 배후”
러 분노한 민심 업고 확전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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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들고 추모
지난 22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크라스노고르스크의 ‘크로커스 시티홀’ 공연장에서 있었던 총격 사건으로 24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가운데 시민들이 23일 크로커스 시청 앞에서 헌화를 하거나 촛불을 들고 사망자를 애도하고 있다.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단체인 ‘이슬람국가 호라산’(ISIS-K)은 이번 사건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밝혔다.
모스크바 AP 연합뉴스
‘러시아의 심장’ 모스크바의 한 공연장에서 괴한들이 자동소총을 난사해 24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단체인 ‘이슬람국가 호라산’(ISIS-K)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밝혔다. 러시아가 ‘이번 테러에 우크라이나가 연계됐다’고 주장하면서 3년째로 접어든 우크라이나 전쟁이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3일(현지시간)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은 “이번 테러의 핵심 용의자 4명을 포함해 관련자 11명을 검거했다”면서 “핵심 용의자 모두 모스크바에서 남서쪽으로 약 300㎞ 떨어진 브랸스크 지역에서 검거됐다”고 밝혔다. 브랸스크는 우크라이나 국경과 가까운 곳이다.
러시아 국영 통신사 러시아투데이(RT)의 편집장 마르가리타 시모냔이 공개한 영상을 보면 테러 용의자 가운데 1명인 샴숫딘 파리둔(26)은 심문 과정에서 “지시자가 ‘공연장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살해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지난 4일 튀르키예를 통해 러시아로 입국했다”고 말했다.
그는 “신원 미상의 ‘전도사’라는 인물에게 50만 루블(약 730만원)을 받기로 하고 테러를 결심했다”고 덧붙였다. 실제 받은 돈은 약속한 액수의 절반에 불과했지만 지시자는 ‘(범행 이후) 100만 루블을 추가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지난 22일 모스크바 북서부 크라스노고르스크의 ‘크로커스 시티홀’ 공연장에 최소 4명의 무장 괴한이 들어와 총을 무차별 난사하고 인화성 액체를 뿌려 공연장 건물에 불을 질렀다. 러시아 당국은 “이 사건으로 지금까지 133명이 숨졌으며 107명이 병원에 입원 중”이라며 “사망자가 더 늘어날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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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크라스노고르스크의 ‘크로커스 시티홀’ 공연장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으로 공연장 지붕이 불타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 특수작전 군인들이 현장을 통제하고 있다. 이번 테러로 240여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은 이번 테러의 핵심 용의자 4명을 포함해 관련자 11명을 검거했다고 밝혔다.
모스크바 타스 연합뉴스
러시아에서 2000년 전후 체첸 분리독립주의자들이 벌인 일련의 테러 공격 이후 최대 사건이다.
지난 15~17일 실시된 대선에서 87%가 넘는 압도적 득표율로 5선에 성공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선거 다음날인 18일부터 사실상 ‘집권 5기’에 돌입했다. 그런데 채 일주일도 안 돼 수백명의 희생자를 낸 초대형 참사가 벌어져 리더십에 상처를 입었다.
30년 장기 집권의 길을 연 푸틴 대통령의 ‘차르 대관식’에 찬물을 끼얹은 사건이라는 분석이다. 이날 푸틴 대통령은 성난 여론을 달래고자 24일을 국가 애도의 날로 지정한 뒤 “배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찾아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사건 직후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단체 이슬람국가(IS)의 아프가니스탄 지부인 ISIS-K가 텔레그램을 통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를 믿지 않는 분위기다. 대신 테러의 ‘진짜 배후’로 우크라이나를 지목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번 총격·방화 범행에 직접 연루된 4명이 우크라이나 접경지 브랸스크에서 체포된 점을 언급하며 “우크라이나 쪽에 (이들이)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창구가 마련돼 있었다고 한다”면서 “우리는 평화롭고 무방비 상태인 사람들을 상대로 조직적인 대량 학살을 마주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미국이 2001년 9·11 테러 뒤 배후로 지목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전면전을 벌였듯, 러시아도 우크라이나가 이번 테러에 개입한 증거를 찾아 전례 없는 보복에 나서겠다는 ‘엄포’다.
반면 우크라이나 측은 러시아의 주장을 일축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일은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다. 푸틴과 다른 인간쓰레기들이 (러시아 주민들의 비난을 피하고자)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려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존 커비 미국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국가안보소통보좌관도 브리핑에서 “아직까지 우크라이나가 이번 사건에 연루돼 있다는 징후는 없다”며 젤렌스키 대통령을 ‘엄호’했다.
이처럼 우크라이나가 ‘테러와 무관하다’고 호소하지만 러시아는 어떻게든 우크라이나로 책임을 돌릴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번 대선에서 ‘더 강한 러시아’를 표방한 푸틴 입장에서 모스크바 테러는 ‘대통령 5기’ 초반 리더십의 향배를 가를 중대한 사건이다. 이 때문에 분노한 민심을 등에 업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확전에 나설 공산이 크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가 더 나빠지면 국제사회가 바라는 휴전 가능성은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안 그래도 푸틴 대통령이 안보 정책에 대대적인 변화를 줄 구실을 찾고 있었다. 이번 테러가 그 빌미가 될 것”이라고 짚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서 내부 반대 의견을 가혹하게 진압하거나 전쟁의 판을 키우고자 추가로 군인을 징집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안드레이 카르타폴로프 러시아 하원 국방위원장은 “우크라이나가 이번 테러의 배후로 밝혀진다면 러시아가 전장에서 분명히 대응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해 키이우에 대한 보복을 요구했다고 로이터통신이 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뉴욕타임스(NYT)는 “미 정보기관이 러시아 측에 ‘푸틴 대통령 취임 직후 열릴 모스크바 콘서트에서 테러 공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를 수차례 전달했음에도 푸틴 대통령이 이를 무시했다”고 타전했다.
되레 푸틴 대통령은 지난 19일 연설에서 “서방국이 우리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려는 시도이자 노골적 협박”이라며 미국의 첩보를 비웃었다. 일각에선 크렘린의 ‘정보 분석 실패’가 이번 참사를 야기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류지영·최영권 기자
2024-03-25 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