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세계 지도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졌다, 만들었다는 말이 더 맞는다. 2020년 11월 15일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 서명된 시기였다.
2015년 10월 미국이 주도하고 중국을 배제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타결되었다. 중국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명백했다. 이어 2017년 등장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일방적 미국주의(America First)’를 주창하면서 극단적 보호주의를 추진하자 전 세계 경제가 흔들렸다.
세계 지도국 미국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기회를 중국은 놓치지 않았다. 세력권에 놓인 동아시아에 착안했다. 2011년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이 역내 경제 통합을 선도하고자 ‘아세안+6’ 형태의 다자간 무역협정으로 제안한 RCEP의 출범을 사실상 주도하였다.
RCEP는 미국이 빠진 상태에서 아시아 주요 국가들이 대부분 참여한 국제협정이다. 한국을 포함하여 중국, 일본, 뉴질랜드, 호주, 아세안 10개국(라오스,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미얀마, 태국, 필리핀, 싱가포르, 브루나이) 등 총 15개국이 회원국이다. 전 세계 인구의 약 30%,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약 30%를 차지한다.
자연 중국에 큰 의미를 가졌다. 중국은 RCEP의 시작으로 역내 경제에서 입지를 확실히 다졌다. 미·중 갈등 고조 속에서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미국을 대신하는 자유무역 수호자의 이미지도 심었다.
그러나 RCEP 체결을 누가 주도했는가보다, RCEP에 누가 무엇을 가져다줄 수 있느냐가 더 중요했다. 특히 회원국 중 경제적으로 압도적 위치를 차지하는 중국의 역할이 중요했다. 국제사회가 세계 지도국에 요구하는, 특히 RCEP 회원국이 희망하는 ‘공공재(public goods)’를 중국이 얼마나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제공할 능력이 있는가가 관심사였다.
중국은 전후(戰後) 미국이 자유무역주의 기치 아래 개발도상국에 보여줬던 시장 개방 사례와 유인책을 참조하여 공공재를 어떻게 제공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했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에 입각한 일본의 지역패권 사례, 전후 70여 년간 이어진 미국 패권 역사의 공과를 면밀히 평가하고, 중국이 이를 대체하고자 한다는 감정을 동아시아 제 국민이 가지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러할 때 RCEP의 연착륙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지도국을 바탕으로 세계 지도국으로서 도약하고 중국 역할론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중국은 RCEP를 발판으로 새로운 세계적 리더십을 보여주어야 했다. RCEP 발족에 기여한 한국과 협력할 공간을 가졌다. 양국을 더욱 돈독한 협력관계로 이끄는 것은 물론이고,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적 공동 번영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의 상호 공감대를 형성해야 했다.
그러나 이후 중국이 보여준 행보는 공공재 공급이 아니라 철저한 중국 중심 국가 이익 추구였고, 애국주의를 활용하였다. 경제를 정치에 확실하게 종속시켰다. 자본과 시장과 자원을 무기로 정치적 이해관계를 강압하고 있다. 중국이 미국과 다를 바 없음에 더해 더 심하다. 경제적으로 제국주의적 행태다.
모든 국가는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고, 그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정치적 안보적 이해관계가 국가의 최우선 국가 이익임은 부정될 수 없다.
그러나 보편적 가치에 있어서만큼은 개별 국가는 국제사회와 함께하는 자세를 보여주어야 한다. 중국이 폭력을 용인하는 태도, 구체적으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비판하지 않는 사실은 국제사회를 크게 실망시켰다. 러시아와의 관계를 중시하더라도, 푸틴이 가지는 안보적 우려를 공감하더라도 폭력에 의한 문제 해결은 반대한다고 중국은 원칙적으로 밝혀야 했었다.
러시아 지지로 중국은 러시아와 북한은 확보했으나, 그 외 대부분의 국제사회를 잃었다. 세계 지도국으로서 정치적 위상이 크게 실추했다. 전쟁의 고통을 뼈저리게 체험한 한국은 이러한 중국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한국인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중국에 크게 실망했다.
북핵 문제 관련 중국의 행보는 한중 관계에 결정타를 날리고 있다. 한국이 처한 안보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다. 중국은 한반도의 분단이 지속되는 한, 북한의 침략을 겪었고 북한의 도발이 상존하는 한, 한국이 미국과 정치군사적으로 협력관계를 지속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북한의 핵 무력이 폐기되지 않는 한, 미국의 군사력에 대한 한국의 의존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배치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를 어떻게 운용하는가, 추가로 배치할 것인가는 한국의 정치적인 선택이다. 자국 땅에 외국군의 주둔, 외국군이 운영하는 무기체계의 존재를 달가워하는 한국인은 없다. 그러나 중국은 북한의 핵 위협이 존재하는 한, 한국인은 국가안보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만약 대만이 핵무기를 갖게 된다면, 중국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북한이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을 개발한 이 지경에 이르렀어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1991년)을 폐기하지 않고 ‘핵 비확산(NPT) 체제’를 존중하고 있는 한국의 손을 중국은 잡아야 한다.
중국은 북핵 문제에 대해 달리 접근해야 한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와 지속적 개발이 과연 중국이 희망하는 한반도 및 동북아의 안정에 도움이 되는가를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핵무기 체계를 완성한 북한이 앞으로도 중국이 원하는 대로 원만한 중·북 관계를 유지할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북한 체제가 근본적으로 주체사상에 입각하고 있음을 중국은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김정은은 북한 경제의 구조적 문제, 대북 국제 제재, 자신의 정책 실패, 감염병, 자연재해 등으로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다. 북한 권력 엘리트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김정은에 대해 불만을 나타낼 수 있다. 북한 주민의 고난도 임계점에 이르고 있어 폭발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은 바로 지금이 중국의 대북 영향력이 가장 크다는 사실을 말한다. 중국이 원하는 중·북 관계, 한반도 및 동북아 정세를 이끌 수 있는 기회다. 이 시점을 놓치면 북한은 더 이상 중국이 그리는 북한이 아닐 수 있다.
중국은 국가 이익을 위해서, 세계 지도국으로 역할하기 위해서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주어야 한다. 중국이 예전의 중국이 아님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강해졌다고 힘에 의존한다면, 하수(下手)다. 힘이 있으면서도 보편적 가치에 입각하고 상대의 입장을 고려할 때, 힘은 더욱 강하게 전달된다. 한중 수교 30년 이후 시진핑 주석 3연임 이후 중국에 거는 기대다.
통일은 남북한의 합의와 국제사회의 지지 속에 현실화될 수 있다. 남북 주민의 통일 의지가 가장 중요하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이 갈등하는 한 통일 과정은 험난할 수밖에 없다. 특히 미국과 중국의 관계와 역할이 중요하다.
백두산 정상에서 통일 옷깃을 여미고 가득 안은 통일 정기를 이들에게도 나누기 위해 각국에서 의미가 큰 산을 찾기로 했다. 먼저 중국 태산(泰山)을 올랐다. 태산은 예로부터 신령한 산으로 여겨졌으며, 진시황제나 전한 무제, 후한 광무제 등이 천하가 평정되었음을 정식으로 하늘에 알리는 봉선식(封禪式)을 가진 장소다.
양사언의 태산가(泰山歌), 통일도 마찬가지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山)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만은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손기웅베를린장벽 붕괴를 현장에서 체험하고 통일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원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통일연구원에 봉직했으며 지금은 한국평화협력연구원장, 한국DMZ학회장, 한독통일포럼 공동대표, 중국 톈진외대 초빙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독일통일: 쟁점과 과제 1·2′ ’30년 독일통일의 순례: 동서독 접경 1393㎞, 그뤼네스 반트를 종주하다’ ‘통일, 가지 않은 길로 가야만 하는 길’ ‘통일, 온 길 갈 길’ 등 저서가 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