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하이밍 말폭탄, 中의 노림수는
‘힘의 외교’ 압박 더이상 안 먹히자
야당 접촉하고 직접 원고 ‘기획’도
정재호 주중대사 불러 항의 맞불
중국이 한국에서 여론전을 본격화했다. 시진핑 체제 이후 견지해 온 ‘전랑(늑대전사) 외교’를 한층 더 강화하고 공격성을 높인 외교 행태를 한국에 투사한 것이다.
그동안 중국의 전랑외교는 일차적으로 주재국 정치인과 정책 입안자들을 향해 중국의 이익에 맞서는 행동을 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압박하는 데 주안점을 뒀으나 이번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는 처음부터 주재국 국민을 대상으로 여론전을 펼쳤다. ‘여론’과의 직접 접촉을 기획해 원고를 읽었고, 이 원고를 배부하는 등 직접적인 여론 형성을 시도했다. 대개 간접적이고 문화예술 차원에서 이뤄지는 소프트 외교 행태와는 크게 다른 것이다.
해당국의 정치외교적 사안에 대해서는 주로 언론 인터뷰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의견을 피력하는 정도를 넘어 주재국의 ‘야당’을 움직였으며, 공격적으로 주재국 정권을 겨냥했다는 측면에서 극단적이고 가장 강력한 형태의 ‘정치적 개입’을 시도한 사례로 꼽을 만하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특이점이 중국의 조급성을 반영한다고 진단했다.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가 주도하는 ‘반도체 전쟁’을 중심으로 중국 포위가 본격화되자 약한 고리라고 판단한 한국을 먼저 노렸으나, 과거와는 달리 사용할 수 있는 ‘레버리지’가 약해지면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분석이다. 베이징 지도부의 ‘힘의 외교’가 더이상 한국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최일선 현장에서 성과 압박을 받던 싱 대사가 판단 착오로 ‘선을 넘은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우선 중국은 2017년 한반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계기로 한국을 정치·경제적으로 압박할 ‘레버리지’를 대부분 소진했다. 한한령(한류 제한령)으로 게임을 비롯해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 교류가 중단됐고, 대기업들의 타격도 컸다. 이미 한국은 ‘차이나 리스크’를 상수로 받아들이게 됐고 기업도 중국 투자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중국이 한반도 비핵화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감도 크게 줄어들었다. 싱가포르 국제전략연구소 이언 그램 분석관은 최근 뉴욕타임스에서 “상대와의 관계가 응징과 모욕으로 일관된다면 더는 추가 비용이 발생하진 않는다. 관계가 아예 끊어지기 때문”이라며 “중국은 ‘공포나 분노’라는 지렛대를 잃었다. 왜냐하면 중국은 상대방에 늘 화가 난 상태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중국으로서는 한국에 대해 추가적인 보복도 가능하지만 반도체 전쟁으로 인해 주변 환경도 크게 변했다. 중국은 한국 정부와 기업이 미국의 반도체 동맹에 참여하지 않도록 붙잡아야 하는 입장이어서 추가 보복을 단행하는 것은 한국을 미국 쪽으로 밀어내는 꼴이 될 수 있다. 자칫 중국으로서는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게 된다. 이런 가운데 한국은 미국 주도의 경제협력체인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에 가입했고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인 ‘칩4’(미국·한국·일본·대만)에도 참여했다.
싱 대사가 여론을 직접 상대하려 한 또 다른 이유는 한국과의 막후 소통 채널이 단절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달 22일 방한한 류진쑹 중국 외교부 아주사 사장(아시아 담당 국장) 사례가 대표적이다. 한중 국장급 외교협회차 서울을 방문한 류 사장은 협의를 마치고 한국 고위인사들을 만나고 싶어 했지만 대부분 성사가 무산돼 친중국 교수들 몇몇과 면담을 마치고 돌아가야 했다. 주중 한국대사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싱 대사의 전임자인 추궈훙 전 중국대사는 문재인 정부 때 외교부 장관도 건너뛴 채 청와대와 직통 라인을 개설해 정의용 당시 국가안보실장과 상시 소통해왔지만, 지금은 ‘외교 관례’대로 급에 맞는 교류만 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게다가 중국 최고 지도부는 외교 라인에 ‘사드 해결’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어 중국의 현장 외교관들이 크게 곤혹스러워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점들이 싱 대사를 압박해 선을 넘은 ‘베팅’ 발언을 낳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지난 정부에서 주한 중국대사가 원하면 대통령도 만날 수 있는 직통 라인이 있었던 반면 장하성 주중 한국대사는 시진핑 국가주석은커녕 외교장관도 못 만났다”며 “중국이 압박하면 한국이 굴복한다는 그간의 학습효과 때문에 싱 대사도 공세적 메시지를 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럼에도 중국 외교부는 기존의 기조를 계속 이어 갈 조짐이다. 11일 “눙룽 외교부 부장조리가 전날 정재호 주중대사와의 웨젠(約見·회동을 약속하고 만남)을 통해 ‘싱 대사와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교류한 것에 한국 외교부가 부당한 반응을 보였다’며 심각한 우려와 불만을 표명했다”고 밝혔다. ‘웨젠’은 중국 외교당국이 타국 외교관을 만나 항의를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외교부의 ‘초치’에 해당한다.
눙 부장조리는 “싱 대사가 한국 각계 인사들과 접촉하고 교류하는 것은 정상적인 업무”라며 “한국 측이 현 중한 관계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지 되돌아 보고 진지하게 대하길 바란다”고 지적했다. 지난 4월 미국 국빈방문을 앞둔 윤석열 대통령이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중국과 대만 간 긴장과 관련해 ‘힘에 의한 대만 현상 변경에 반대한다’고 언급한 것이 지금의 갈등을 만들어 냈다는 뜻이다. 또 ‘싱 대사는 한국 정부에 항의받을 만한 잘못을 하지 않았다’는 판단에 따른 항의성 발언이기도 하다.
시 주석은 2012년 집권 이후 세계 양대 강국(G2)이라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강력한 ‘힘의 외교’를 펼쳐 왔다. 일본(센카쿠열도 사태)과 한국(사드 사태), 미국(무역전쟁 및 첨단기술 공급망 분리), 캐나다(화웨이 사태), 호주(코로나19 책임론) 등과 차례로 충돌해 지금도 불화를 빚고 있다. 중국 외교관들은 ‘모욕을 받으면 반드시 되돌려 주라’는 시 주석의 기조를 충실히 구현하고자 전랑외교에 적극적이다. 베이징 소식통은 “중국 외교부가 각국에 파견한 대사들의 언론 발언 및 SNS 게재 내용 등을 인사평가에 반영하기 때문에 (대사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전랑외교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베이징 류지영·워싱턴 이경주 특파원· 서울 서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