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무용극 호동’ 이지나 연출·이셋 음악감독
올해로 환갑을 맞은 국립무용단(예술감독 손인영)이 잔치를 준비했다. ‘국립무용단의 아버지’ 송범 초대 단장의 대표작 ‘왕자 호동’(1974)을 오마주한 신작 ‘2022 무용극 호동’(27~29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을 내놓는데, 잔칫상이 화려하다. 뮤지컬계 최고 연출가 이지나가 대본과 연출을 맡고, ‘오징어게임’의 공동작곡가이자 뮤지컬계 스타 음악감독 이셋(김성수)이 작곡·음악감독을 맡았다. 안무는 외부의 명성을 빌리지 않고 국립무용단 고유의 스타일을 체화한 젊은 단원 정소연·송지영·송설이 직접 나서 자존심을 지켰다.
발레의 대표작들이 ‘백조의 호수’‘지젤’ 같은 고전극인 것처럼, 국립무용단도 오랜 세월 ‘무용극’을 만들어 왔다. 1962년부터 30년간 단장을 지낸 송범은 ‘국립극장 대극장을 채울 만한 한국춤을 만들라’는 미션에 따라 ‘별의 전설’(1973), ‘도미부인’(1984) 등 18편에 달하는 대형 무용극 제작에 전념했다. 90년대 국수호·조흥동의 2세대 무용극을 거쳐 2000년대 대표작인 배정혜의 ‘춤, 춘향’(2002), 윤성주의 ‘그대, 논개여’(2012) 이후 무용단은 컨템퍼러리를 본격 표방하며 무용극과 거리를 뒀다. 2017년 ‘3세대 리노베이션 무용극’이라 부제를 붙인 ‘리진’, 정구호의 모던클래식을 내세운 ‘춘상’이 나왔지만 다시 볼 수 없었다.
다수 작품서 호흡 맞춘 찰떡 콤비
무용극의 쇠퇴는 관객의 외면을 받아서다. 뮤지컬 등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는 자극적인 이야기와 화려한 쇼를 내세운 무대가 많아지면서, 집밥처럼 익숙한 무용극이 설 자리를 잃은 것. 뮤지컬계 스타일리스트로 정평 난 이지나의 연출과 대중성과 실험성을 두루 갖춘 이셋의 음악으로 탈바꿈한 ‘호동’이 궁금한 이유다. 쇼비즈니스의 정점에서 활약해 온 두 사람은 어떤 마법으로 관객을 매료시킬까.
두 사람은 2006년 연극 ‘클로저’를 시작으로 뮤지컬 ‘고궁 대장금’‘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곤투모로우’‘썸띵로튼’‘나빌레라’등 수많은 작품을 함께 해 온 찰떡호흡이다. 소규모 실험작을 제외하고 본격적인 무용작업은 처음이라 “한창 싸우는 중”이라면서도 평소 로망을 품었던 무대라며 의욕적인 모습이다. ‘미래의 무용극’이라는 표제를 건 이번 무대에 손인영 예술감독은 “여태껏 보지 못한 뮤지컬적 감수성을 담아낼 것”이라고 소개했는데, 이 연출은 “서사가 아니라 장별로 상징적인 형상을 내세우는 이미지 무용극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대무신왕 역으로 출연하는 연극배우 지현준의 몇마디 대사와 짧은 자막이 서사를 대신한다.
“지금 컨템포러리화된 한국무용은 극을 전달하는 사실적인 연기와 맞지 않아요. 우린 호동이라는 소재로 상징주의 회화를 그리고 있죠. 그림으로 치면 샤갈 정도 될까요. 서사도 국립의 격에 맞는 세련된 방식으로 전달할 겁니다.”(이지나) “애초에 무용극은 상징성을 전제로 하니까요. 소위 예술가의 역할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모아서 암시를 주는 것인데, 어떤 식으로 설득하느냐의 문제겠죠.”(이셋)
대중성을 감안해 뮤지컬 창작진을 섭외했을 텐데, 흥미롭게도 이들은 대중성과 거리두기를 하고 있었다. “50년 전 호동이 훨씬 대중적일 것”이라면서 “무용은 어차피 대중성이 없어야 하는 장르”(이지나)라고 단언했다. “대중의 수가 늘어날수록 작품이 점점 쉬어져야 되니까요. 무용은 대중문화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을 위한 장르라 생각해요. 유치해지면 안되죠.”(이지나) “대중이란 모호한 개념이죠. 컬트 거장인 데이비드 린치 감독도 자기는 대중을 위해 영화를 만든다고 하는 것처럼, 저도 대중을 위해 만든다 생각해요. 다만 산업화가 목적이라면 우리한테 돈을 더 줘야죠.(웃음) 무용은 산업화될 필요가 없는 장르고, 우린 예술적 성취를 위해서 이 작업을 하는 겁니다.”(이셋) “뮤지컬같은 쇼비즈니스는 산업화가 되어야 하지만, 무용까지 산업화를 목표로 한다면 버틸 수 없죠. 다양한 취향의 문화가 존재해야 되요.”(이지나)“다만 산업화가 안 된 장르가 유지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고민하고 있고, 그래서 대중을 위한 거라고 말하는 거죠.”(이셋)
서울예술단의 창작가무극 ‘바람의 나라-무휼’(2006)을 만들며 호동을 탐구했던 이 연출은 이번엔 왕자와 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과감히 내던졌다. ‘고구려 왕자 호동이 낙랑 공주를 이용해 자명고를 찢었다’는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국가의 통제에 저항하는 현대인의 내면을 표현하는 심리극이 됐다. “시대가 바뀌었잖아요. 아버지 대무신왕이 시켜서 낙랑공주에게 접근해 북을 찢게 하고, 여자가 자결하는 걸 보는 열일곱 호동이 고구려에서는 최고 애국자였겠지만, 얼마나 잔혹동화인가요. 국가가 주는 부담감에 등 떠밀려 그런 짓을 할 땐 이게 사는 건가 싶었을 거예요. 그런 접근으로 시작된 무대죠.”(이지나)
자명고도 위험을 알리는 북이 아니다. 각자 가진 감정의 위태로움을 경고하는 ‘내면의 시그널’로 설정됐다. “낙랑을 공주가 아닌 호동의 내면으로 표현하려는 거예요. 사람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 있지만 내면의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충돌이 일어날 때, 내면을 죽이느냐 삶을 죽이느냐의 선택을 요구받는 상황인 거죠. 어쩌면 제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해요. 제가 살고 싶은 방식과 살아야 되는 방식의 차이가 턱밑까지 차서 작품에 나온달까요. 팬데믹 때 극장에 내려진 온갖 철퇴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거든요.”(이지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국가주의적 통제에 개인이 휩쓸릴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고찰을 담은 거죠. 무용극이라고 아름다운 파드되 중심이 아니라, 집단이 가진 광기와 개인의 머릿속 혼란이 모두 격렬한 군무로 표현돼요. 파드되도 있지만 독무라 생각하면 됩니다. 아름다운 사랑이 아니라 기괴한 내면을 보여주는 춤이 되겠죠.”(이셋)
무용극이지만 방점은 비주얼보다 음악에 찍힌단다. 이 연출은 “국립무용단이 비주얼적으로는 안해 본 시도가 없기에 이셋의 파격적이고 미래적인 음악으로 차별화를 시도했다”고 했다. 전자음악과 국악기를 독특한 방식으로 사용해 의도적으로 내러티브를 깨는 소외효과가 음악의 콘셉트인데, 자칫 스토리를 따라가려는 관객을 내면에 집중하도록 하는 장치다. “국악기를 쓰지만 일반적인 주법이 아니라 분절화해서 다른 방식으로 최소화해서 썼어요. 긴장감이나 이질감을 느끼게 조각조각 샘플화해서 군데군데 심어놓은 거죠. 처음엔 국악기를 아예 안쓰려 했는데 무용단 측에서 너무 불안해 하셔서요.(웃음) 민속적인 악기의 질감이 음악을 지배해 버리면 너무 쉽고 재미없잖아요. 제가 하고 싶은 건 국악의 장단에 기반하면서도, 어떤 악기를 써도 같은 걸 해낼 수 있게 DNA를 침투시키는 일이니까요.”(이셋)
대중 아니라 세계를 겨냥한 무대
알고 보니 이들의 목표는 집 나간 무용극 관객을 되찾는 일이 아니었다. 세계인이 공감할 만한 우리 무용극을 만들고자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국립의 위용은 컨템포러리에 굉장히 열려 있다는 점이란 걸 느꼈어요. 한국 전통에 베이스를 두고 있지만 그 뿌리를 포크나 에스닉이 아니라 세련되게 어느 나라에서나 부담스럽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 숙제죠.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고 하지만, 그건 민속이지 동시대적인 게 아니니까요. 누군가 이걸 한국무용이 아니라고 할지 몰라도, 2022년에 한국무용이 여기까지 왔다는 걸 보여주는 작업이라 자랑스럽게 생각해요.”(이지나) “스코틀랜드 민속음악이 미국으로 넘어가 컨트리, 포크가 됐어요.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넘어간 흑인음악을 1940년대만 해도 백인들이 자기네 음악이라 우겼었는데, 지금은 대중성을 획득하니 더 이상 우길 수 없거든요. 우리 음악도 놀랍게도 대중성을 획득하고 있으니 한번 명찰을 떼 보자는 시도예요. 사물놀이는 사물이 없으면 연주할 수 없지만, 어떤 악기로든 연주할 수 있는 소리로 조합하면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고 갈 수 있으니까요. 저들이 우리 DNA를 연주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진정한 세계화 아닐까요.”(이셋)
그렇다고 난해한 무대는 아니다. 파국을 맞는 클라이맥스에선 쇼비즈니스의 거물들답게 감동을 만들어낼 예정이다. “무용극이란 게 굉장히 다양한 음악이 필요해요. 연출님이 클라이맥스엔 멜로드라마를 요구하시네요. 마리아 칼라스의 오페라 같은 음악을 쓰면 효과가 엄청날 거라고 하시니, ‘하늘이 내리는 멜로디 라인’을 기다리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어요. 힘들지만 재밌습니다. 평소 호페쉬 쉑터처럼 음악적인 연출을 하는 현대무용 공연을 즐겨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영감도 많이 얻거든요. 너무 좋은 기회라 생각해요.”(이셋) “저도 무용 작업이 더 취향에 맞네요. 라이선스 뮤지컬은 사실 정서에 맞지 않지만 살기 위해 하거든요. 그래서 창작물을 할 땐 ‘바람의 나라’나 ‘잃어버린 얼굴 1895’‘클럽 살로메’처럼 무용이 지배적인 무대로 만들었죠. 그런 작업이 없었다면 내가 진짜 호동이 됐을 것 같네요.(웃음)”(이지나)
유주현 기자 [email protected]